실학(實學)의 평등 사상과 그 한계
조선의 견고한 신분제 사회에서도 일찍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과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 1803~1879) 등 일련의 실학자들은 사람은 개체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근본적으로 평등함을 주장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노비를 재물로 삼고 있다. 사람은 모두 같은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물로 삼을 수 있겠는가.(유형원, 『磻溪隨錄』, 卷26, 續篇下, 奴隸)
사람을 관리로 채용함에 있어서는 오직 그 현명함과 재질을 기준으로 할 것이며 문벌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같은 책, 卷13, 任官之制)
귀천(貴賤)의 신분을 세습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같은 책, 卷10, 敎選之制下, 貢擧事目)
재능과 기량(器量)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귀천의 차이가 없는데, 요즈음은 문벌만 숭상하여 문벌이 없는 자는 백 명 중 하나도 진출하지 못한다.(이익, 『星湖先生全集』, 卷45, 論用人)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천하 고금에 없는 것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 세대에 걸쳐 고초를 겪는다. 이것도 가엾은 일인데, 더구나 반드시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법에 있어서랴. 어미의 어미와 그 어미의 어미의 어미로 거슬러 올라가 멀리 십 세대, 백 세대에 이르면 어느 세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는데, 막연히 이어진 외손들로 하여금 하늘과 땅이 다하도록 한없는 고뇌를 받으며 벗어날 수가 없게 한다.(이익, 『星湖僿說』, 권12, 人事門, 奴婢)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士)다."(박지원, 『燕巖集』, 권5, 答蒼厓) "천자도 원사(原士)다. 원사란 생인(生人)의 근본이다. 그 관직인즉 천자이고, 그 신분인즉 사다.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나 그 신분에는 변화가 없다.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나 '사'라는 점에서는 바뀌고 옮김이 없다.(같은 책, 권10, 雜著, 原士)
편협하고 사사로운 인재 선발 방법을 통절하게 개혁하여 나라의 인재를 빠짐 없이 등용하는 일, 이것이 국가의 행복이고 그야말로 옳은 일이다.(정약용, 『與猶堂全書』, 文, 卷8, 策, 人才策)
타고난 그릇과 재능의 우열(優劣)로 귀천(貴賤)을 구분하는 것이 참다운 귀천이요, 문벌이나 직업의 존비(尊卑)로 귀천을 나누는 것은 속된 귀천이다. 만약 속된 견해로 천하다 하여 참으로 귀한 인재를 버린다면, 필경 속된 견해로 귀하다 하여 진짜로는 천한 자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참된 것과 속된 것은 함께 쓸 수가 없으니, 차라리 속된 것을 버리고 참된 것을 취해야 할 것이다.(최한기, 『人政』, 권15, 選人門2, 擧賤)
실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들 사이의 신분상의 차별이나 출신지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변을 폈다. 그러나 그 논거로 어떤 상위 원리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으니, 말하자면 그들은 평등 그 자체를 자명한 원리로 ― 그러니까 서양 근대 사상적 용어로 표현하면, '천부 인권'으로 ― 납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천민' 개념을 완전히 버렸다고 볼 수는 없고, 더구나 남녀 차별이 분명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적 차별은 문제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까지 서양의 계몽주의 평등 사상가들에게서도 '평등'은 다수의 하층민과 여성이 제외된 시민 계급의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동서 구별 없이 인류의 지성이 아직 이 점에서까지 개명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실학자들은 평민 이상의 백성을 염두에 두고서 평등 사회 구현을 논했다. 그리고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재산의 균등한 소유가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능히 재산을 고르게 해서 다같이 잘 살게 하는 자를 임금이요 목민자라 할 수 있다.(정약용, 『與猶堂全書』, 卷11, 論, 田論1)
사회주의를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소비재를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을 평등하게 하고자 하는 이념으로 이해한다면, "실학의 정치 사상에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다"(김한식, 『實學의 政治思想』, 일지사, 1979, 345면)고 볼 수 있다. 유형원, 이익, 홍대용, 정약용 모두가 당시로는 거의 유일한 생산 수단인 토지의 사유화를 부정하고 국유[王土] 내지 공유를 주장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중국의 균전제(均田制) 내지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왕정(王政)이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데로 귀결하지 않으면, 모든 게 구차할 뿐이다. 빈부(貧富)가 고르지 못하고, 강약(强弱)의 형세가 다르면, 어떻게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내가 전에 균전론(均田論)을 지었는데 [『星湖先生全集』, 권30; 『霍憂錄』, 均田論 참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농지의 일정 크기를 한계로 정하여 한 농부의 영업전(永業田)을 만든다. 농지를 많이 가진 자의 것을 빼앗지 않고, 농지가 [그 이상] 없는 자를 추궁하지 않는다. 영업전으로 정한 농지 이외에는 마음대로 사고 팔게 한다. 단, 농지를 많이 가진 자가 남의 영업전을 취해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그 문권(文券)을 빼앗아 불사른다. […] 농지를 파는 자는 필시 가난한 집이다. 가난하지만 자기의 농토를 팔 수 없게 하면 겸병(兼幷)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한 농부가 영업전을 경작하여 수입이 있고 지출이 없으면, 가난한 집이 재산을 탕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 영업전은 [정전제(井田制)의] 공전(公田)의 정신에 비추어 만든 것이니, 이를 벗어나면 이내 농지가 없는 집이 생긴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이익, 『星湖僿說』, 권7, 人事門, 均田)
아홉 도의 전답을 고루 나누어주고 10분의 1을 세로 징수한다. 남자로서 가정을 가진 자는 각기 2결(結) 씩 받도록 한다. ― 그 자신에 한하며, 죽으면 3년 후에 다른 사람에게 옮겨준다. ― (홍대용, 『湛軒書』, 內集, 補遺, 권4, 林下經綸)
후세에 정전법(井田法)을 부활시키지 아니하면 왕도(王道)는 결국 실행될 수 없을 것이다.(같은 책, 附錄, 從兄湛軒先生遺事(從父弟大應書))
정전(井田)이란 성인의 경법(經法)이다. 경법이란 예나 지금이나 통할 수 있는 것인데, 예전에는 시행하기 편리했지만 지금은 불편하다는 것은, 필시 법을 밝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천하의 이치가 예와 지금에 다름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정약용, 『經世遺表』 권5, 田制1, 井田論1)
그런데 이들 실학자들의 균전 내지 정전의 법은 국토 전체가 왕(王)의 것, 요즈음의 주권 개념을 적용하면 국가의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김인규, 『북학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근대적 성격』, 도서출판 다운샘, 2000, 206면 참조) 곧, 생산 활동 내지 재산의 원천은 만인의 공유라는 생각은 재산 형성의 원천인 토지가 개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며, 공공의 것은 결국 왕의 것이라 보았으니, 주권(主權)자는 왕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정약용, 『經世遺表』 권7, 田制9, 井田議1 참조) 그래서 실학자들의 사상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한결같이 민중 주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공전(公田)의 법은 지극히 순리적이고, 지극히 편안하며,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요긴하다. 무엇을 꺼려 시행치 않는단 말인가? 제왕이 천하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이밖에 다시 다른 법은 없다. 만약 후세에 마침내 이를 시행치 못한다면 마침내 제대로 된 통치를 바랄 수가 없다. 진실로 영명한 군주가 있어 단연코 이를 시행한다면, 고금(古今) 화이(華夷)를 막론하고 본래 시행치 못할 것이 없다.(유형원, 『磻溪隨錄』, 卷2, 田制下, 16)
실학자들이 정전(井田)과 공전(公田)의 법을 세우려 했던 취지는 민생의 안정에 있었으며, 그들은 통치자의 첫 번째 책무를 백성들이 두루 잘 살게 보살피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국민 주권 개념은 없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고는 하나, 이런 배려 이면에는 그러나 일반 백성은 '가축'이고, 관리(官吏)는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 [牧夫]이라는 전근대적인 생각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옛날에 순임금은 요임금의 뒤를 이으면서 12목(牧)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기르게 하였으며, 문왕이 정치제도를 세울 때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는 평육(平陸)에 갔을 때 [『孟子』, 公孫丑下 참조] 추목(芻牧 : 가축 사육)으로써 백성을 기르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가리켜 목(牧)이라 한 것이 성현의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사도(司徒)는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修身)케하고, 태학(太學)에서는 국자(國子 : 왕족 및 공경대부의 자제)를 가르쳐 각기 수신하고 치민(治民)케 하였으니, 치민하는 것이 목민(牧民)하는 것이다. 그런즉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정약용, 『牧民心書』, 自序)
웃사람을 섬기는 자를 민(民)이라 하고 목민하는 자를 사(士)라고 하니, 사는 벼슬하는 자이고, 벼슬하는 자는 모두 목민하는 자이다.(같은 책, 권1, 赴任, 第一條 除拜)
일반 국민들을 평안히 살도록 살피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 한다 하더라도, 백성은 가련한 자식이나 양떼고, 통치자는 인자해야 할 어버이나 목자(牧者)라고 생각하는 것은 국민 주권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한' 사회의 이념과도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웃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백성들간의 '평등'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실학자들의 정치 사상도 기본적으로는 유교 정치 이념, 그것도 원시 유교적 정치 이념의 틀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출처
제공처 정보
저자 백종현
제공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http://philinst.snu.ac.kr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實學)의 평등 사상과 그 한계 (철학의 주요개념,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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