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석박사과정]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한신학 han theology 2017. 3. 26. 14:26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자네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있지 않은 것’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당혹스러워 하고 있지 않은가”

플라톤, [소피스테스]


‘있다’는 뜻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차이를 안다. ‘존재한다’는 좀 딱딱한 말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아기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한다. 그래서 엄마가 있으면 웃고, 엄마가 없으면 운다. 일상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존재한다’는 뜻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간파한 이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었다. 플라톤은 그가 쓴 대화 편 [소피스테스]에서 ‘존재’ 문제가 깊은 층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섬세하게 벗겨낸다. 도대체 아기도 구분하는 이 문제에서 무엇이 당혹스럽다는 것인가?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그리스로 떠나는 철학 여행의 짐을 싸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를 현대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은 철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2500년 전에 플라톤이 물었던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그가 쓴 대표작 [존재와 시간]은 바로 위에 적힌 플라톤의 구절을 인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그는 답한다.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스러움에 빠져 본 적이라도 있는가? 그는 다시 답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한다.



 



존재를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을 과학의 시대에 다시 제기하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은 일차적으로 그가 쓰는 생경한 용어에서 온다. 하이데거는 끊임없이 말을 비틀어서 새로운 말을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철학 용어가 은어로 다가온다. 번역어로 접하는 우리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왜 이렇게 말을 비비 꼬았을까? 대체로 언어를 변형시키는 것은 시인의 몫이지 철학자의 몫은 아니다. 때로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말을 찾지 못하면 말을 비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어에는 일상적 언어와는 다른 어떤 울림이 있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철학적 사유는 익숙하고 명료하며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낯설고 모호하며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 철학이 명료한 체계를 우선하는 과학보다는, 모호하지만 울림을 주는 예술에 보다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시작(詩作)을 ‘철학의 누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는 독일의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의 시구를 빌어서 “철학은 향수이며,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근원적 사유라는 점을 여러 방식으로 강조한다. 데카르트이후의 철학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뿐, ‘철학에서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세계는 단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만으로 세계는 온전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간파한 것처럼 세계는 숨기를 좋아한다. 더욱이 과학적 탐구 방식으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 존재 양식을 가진 존재도 있다. 바로 인간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방식을 둘러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격돌을 ‘존재를 둘러싼 거인 족의 싸움(gigantomachia peri tes ousias)’이라고 불렀다. 그 싸움은 우리가 1년 전 쯤 ‘철학의 숲’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끊임 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와 변화와 생성을 뛰어넘는 존재의 문제를 둘러싼 충돌이며, 또한 우리가 그러한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격돌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철학으로부터 시작하는 물음은 항상 형이상학적 물음이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물음은 가장 궁극적이고 포괄적이다. 철학은 오로지 철학함으로서만 존재하며, 그 점에서 철학은 결코 형이상학적 물음과의 대면을 회피할 수 없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학적 방식으로 제기된 존재 물음

 



세계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동원한다. 현상학은 하이데거에게 프라이부르크 대학철학과 정교수 자리를 물려준 하이데거의 스승,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개척한 방법이다. 하이데거는 현상을 “자기 자신에 즉해서 자기 자신을 현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현상학을 “자기 자신을 현시하는 그것을, 그것이 자기 자신의 편에서 자기 자신을 현시하는 그대로 그것의 편에서부터 보이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네이버 캐스트에 실린 한 편의 시를 통해서 풀어보자.



지루한 장마 끝/된장 속에 들끓는 구더기 떼를 어쩌지 못해/전전긍긍하던 아내는/강 건너 사는 노파에게 들었다며/담장에 올린/푸른 강낭콩 잎을 따다/장독 속에 가지런히 깔아 덮었다(고진하, ‘푸른 콩잎)




하이데거가 철학과 정교수로 있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1960년 대 모습). <출처: Bundesarchiv, B 145 Bild-F010462-0003 / Wegmann, Ludwig / CC-BY-SA at en.wikipedia.org>



이 시가 전하는 사연은 간단하다. 된장 독에 들끓는 구더기 때문에 고민하는 시인의 아내가 콩 잎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장독, 된장, 강낭콩 잎, 구더기 등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물들이다. 물리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사물은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학의 눈으로 볼 때, 강낭콩 잎과 구더기는 DNA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경험에서 원자나 DNA는 자신을 현시하지 않았다. 아마도 물리학자는 시인의 경험이 물체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튀어나온 빛의 파동에 불과하다고 시인을 설득할 지도 모른다. 이 때 물리학자의 논증은 현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물리학자는 시인이 현실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그 경험을 물리학적 용어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경험은 물리학자의 물질 작용의 인과적 설명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세계를 단순한 물리적 대상의 총합으로 환원하는 데 반대하는 이유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존재자의 총체로서의 세계다. 둘째는 특정한 존재자의 영역을 의미하는 세계다. 예를 들어 물질의 세계, 생물의 세계, 수학의 세계 등과 같이 영역이 구별되는 세계다. 세 번째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세계로 하이데거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고, 또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거론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좀 과감하게 말하면, 인간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지구에서 어느 날 사라지면 지구도 함께 사라진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이 없어도 지구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다시 앞의 시를 살펴보자.



우리가 먹는 된장에 구더기가 끓는다. 시인의 아내는 된장을 살리기 위해 콩 잎을 덮었다. 이것은 된장을 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또는 된장을 화학적으로 분석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세계를 고려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제 아무리 훌륭하게 된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더라도 시인의 아내가 왜 된장에 콩 잎을 덮었는가를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 맥락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삶의 장으로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조적 계기와 요소들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세계를 직접 만나볼 것을 권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는 힘을 키우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현상학적 방법으로 세계와 직접 대면하라는 뜻이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만나는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Habermas)는 하이데거 철학의 공헌을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가고 있는 생활 세계의 위기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인간은 존재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자

 



하이데거가 지향했던 철학의 궁극적 과제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존재의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숨을 죽이며 연구한 것”이었지만, 그 후로는 긴 침묵에 빠져버렸다. 그러한 존재 물음은 결코 제기하지 말아야 할 것, 또는 너무나 자명한 것, 또는 내용이 텅 비어서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서양 철학은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았다. 그 결정적 계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에 있다.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 


<출처: Wikipedia>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설명은 이렇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 존재자가 각기 이미 그것으로 이해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자(das Seiende)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 그것과 우리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 맺고 있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정의한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구분이 선명하게 파악되는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신조어는 대부분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하이데거는 이 차이를 ‘존재론적 차이’라고 명명했다)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용감하게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저술한 1백 권에 가까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도 존재와 존재자의 문제에 대한 2500년 동안의 서양 철학의 오류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존재자 구분법에 따르면, 존재자는 눈에 보이지만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기도 쉽게 구분하지만, 존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자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지평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를 자명한 것처럼 여기기도 하고, 존재의 문제를 철학적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존재론은 바로 그렇게 태어났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 존재 문제를 둘러싼 거인 족 간의 논쟁의 불씨를 되살린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추적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좁다. 그러나 최소한 존재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그의 기본 전략만큼은 언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푸는 실마리로 인간의 존재 양식에 주목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존재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그의 설명을 그대로 가지고 오면,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이해하면서 이 존재와 스스로 관계하는 존재자이다”. 그는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로도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굳이 그를 분류한다면 서양 2500년 존재의 역사를 새로운 사유의 틀로 선보인 형이상학자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하이데거 철학은 나치즘과 무관한가?

 



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구체적 삶과 떼어놓고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사상과 삶을 엄격하게 떼어놓고 보기 힘든 때도 있다. 하이데거와 같은 경우는 더 그렇다. 그는 평생 강의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은 모범적인 학자의 전형이다. 그에게는 세속적 취미 생활이 거의 없었다. 신문도 거의 읽지 않았으며, 집에는 텔레비전 수상기도 없었다. 그는 글을 읽고 쓰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의 길지 않은 총장 재임 시절의 오점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오점이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공식적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가장 포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은 1966년 9월23일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다. 하이데거의 희망에 따라 사후에 발표된 이 인터뷰에서도 하이데거의 입장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오류를 인정한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오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그러나 그는 나치에 참여했을 당시에 가졌던 정치적 견해와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주장을 펼친다. [슈피겔]이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지만,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그래서 과연 하이데거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가 범했던 정치적 오류와 똑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또 무엇보다 개인적 인물로서의 하이데거가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하이데거 철학이 과연 파시즘과 무관한가 하는 질문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끝내 석명하지 않은 것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그 이유가 유달리 강한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지, 변함없는 정치철학적 소신 때문이었는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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