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로마군 집정관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갖은 수사학을 동원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결국 빌라도는 말이 갖는 설득력보다는 무엇인가를 보임으로써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 (수사학에서는 이를 subiectio sub oculos라고 칭한다. '눈 앞에 보임'이란 뜻이다.) 즉 예수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함으로써 예수가 스스로 자기는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헛소리임을 밝힌다는 수작이다. 이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그는 육체적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에게 가시관을 얹히고 자색옷을 걸치게 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의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보임으로써 예수가 신이 아님을 보이고자 했으며 따라서 그를 석방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허나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Verbum Dei, 즉 신의 말이 살이 붙은 모습으로 현현되어버린 것이다. 예수가 신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 수작이 도리어 예수는 신이 인간화된, 태초의 그 말에 살이 붙은, 신의 체화가 이루어진 모습으로 모든 인간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 반전, 이 엄청난 반전을 빌라도는 뒤늦게 깨닫는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건네주려 한다. 주지하다시피 유대인들은 로마법에 의한 처단이 자신들의 성에 차지 않음을 알고 한 술 더 떠 새로운 요구를 한다 - 신성모독죄. 이로써 이 사건은 법적 차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는 관계로 생략한다.
단지 위의 짧은 글은 요한 복음의 첫 가르침 "태초에 말이 있었다"가 그 이후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이런 식으로도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감을 보이고자 했을 따름이다. 영혼과 육체라는 고대 희랍적 이등분법 대신 육체화된 영혼 내지는 영혼의 육체화를 통해 그 태초의 말에 살이 붙음으로써 신의 말을 세상에, 무매한 인간들에게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설득시키고자 했던 예수의 삶을 다시 한번 기려보자는 의도도 있다.
그 -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영혼이란 육체를 결정하는 형상으로서의 엔텔레키아를 형성한다고 봄으로써 영육이 하나의 실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고있고 그 이전의 대부분 철학적 사유 역시 기본적으로 영육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통상적 철학사의 이해로 알고있습니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류의 신플라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육체에 묻(갇)힌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고대 희랍 철학에서 색다른 모습이고 또 그런 이유로 인해서 후일 중세 철학, 특히 스콜라 철학에서 그 틀이 전용되기도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뭐 꼭 철학자들의 리스트를 줄줄이 적지 않더라도 근대 올림픽의 원형이라 할만한 그리스 시대의 육체적 유희나 장례 행사 ( 장례 행사시에 발가벗고 대지 위를 방방 뛰어다닌다던가 했던 것은 결국 죽은 자의 혼을 산자의 육신을 통해 기꺼이 전수하려는 모습이라죠.^^ )등등 그리고 고대 희랍의 예술 작품들이 증거하는 ( 당대의 도자기 작품, 조각 작품들이 갖는 육체의 풍부한 강조와 볼륨이 중세에 들어 영혼의 불멸이 강조되면서 비루하고 별볼일 없게 되어버리고 또 그렇게 묘사될 뿐인 육신의 처지와 비교하면 선명하게 구별되어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것들도 영육 분리의 이원론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않나싶습니다.
확고한 이원론이야 데카르트에 들어서 완전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양자의 우선 순위매기기는 플라톤에서 발아해서 기독교 사상 속에서 완벽하게 드러나는 전형적 모습이 아닐까요?
특별한 해석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예술사나 철학사에서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야 르네상스 예술과 정신이 회복하려는 것이 무엇인지가 뚜렷해질 것도 같구요.
사실, 서동철님께서 적어주신 본 글이 갖고있는 주제와는 약간 벗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형상화, 육신으로 체현된 신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언급되고있는 한 구절, "영혼과 육체라는 고대 희랍적 이등분법 대신 육체화된 영혼 내지는 영혼의 육체화를 통해"는 통상적 이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보았기에 적었습니다.
제가 너무 상식적인 지식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만 의문을 통해 제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이니 의구심을 지속해 봅니다.
댓글에서 말미에 인용하신 요한 복음의 구절도 만일 영육의 미분리나 통합에 주안점이 정말 놓인 것이라면 그 문장의 역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부분에서 육신이 말씀의 불가피한 요소라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어야 영육은 어떤 순위 매김의 모습에서 벗어나있는 것이 아닌가 싶거든요. ( 기독교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한다면 다른 의견이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서구 중세 당시의 기독교 사상에서 드러나는 육신이란 순수한 영혼이 내려앉아 그 형상화를 실현하는 곳은 될지언정 영혼과 합일해서 어떤 동일한 주도권을 소유하는 정도, 오늘날의 철학자 김재권의 심신수반론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이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지 ... ???
나 - 플라톤은 영혼의 독립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를 세 등급으로 나누는데, 밑에 두 놈들은 육체와 결합되어 종말이 있는 반면 제일 윗 놈은 불멸이라 가르치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양자 분리의 상태에서는 그 결합을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보고 님 말씀하신대로 영혼을 육체를 형성하고 보유하고 움직이는 원리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님 말씀하신 엔텔레키아 말입니다. 단지 이 양반이 갖는 문제는 그렇다면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게지요. 이에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허나 따라서 영혼과는 구분되는 누스라는 놈을 등장시킵니다. 플라톤에 있어 최고의 영혼 마냥 불멸의 거시기라 합니다.
여기까지. 지식과 지식이 맞부딪히는 모습이니 어째 좀 싱겁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앞섬을 고백합니다.허나 말씀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부분에 대해선 한 말씀 드립니다. 이 가르침이 내포하는 뜻을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결합 내지는 통일로 보고 이를 철학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해답을 제시했다는 의미로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결합을 말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즉 신의 인간화, 이러한 Inkarnation은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품었던 영혼은 육체와 다른 무엇이다라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말씀’이 이를 통해 완전 실제가 되어 버리며 따라서 그리스 인들에게서처럼 오로지 영적인 성질이 부여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게지요.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그 신들도 인간 세상 속에서 움직입니다만 그들은 단지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이고 ‘육신이 된 말씀’은 실제 인간이 되어 예수는 엄연히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만 살펴 보면 이는 결코 작은 차이는 아니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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