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www.aladin.co.kr/shop/common/wbook_talktalk.aspx?ISBN=8976823680&CommunityType=Underline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현상학의 역사를 아우르는 탁월한 해설!!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현상학적 혁신의 의미를 밝혀내다!!
스위스의 천재적인 철학자 피에르 테브나즈(Pierre Thevenaz, 1913~1955). 그의 고전적 현상학 해설서『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De husserl e merleau-ponty: Qu'est-ce que la phenomenologiee, 1966)가 그린비출판사의 ‘철학의 정원’ 일곱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사후에 스위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원본인 프랑스어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영어번역판이 서둘러 나올 만큼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현상학의 고전적 해설서로 평가받아 왔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면이 이러한 평가를 가능케 했을까? 이 책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여러 현상학자들의 개별적 사유내용이 아니라, 현상학 자체를 근본적으로 가능케 하는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이다. 현상학적 환원이란 본질과 가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했던 고전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인식 대상들이 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주체의 의식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현상’(phenomene) 자체의 순수한 투명성에 주목하는 방법을 말한다. 저자 테브나즈는 현상학의 이러한 방법 전환이 서양철학사에 거대한 단절을 그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현상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현상학 고유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테브나즈는 네 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경유한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현상학적 존재론을 정초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프랑스 현상학의 대표 주자들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각각 상이한 개념과 주제에 주목했던 이들을 한곳에 불러 모은 것은 고전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추구한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이었다. 테브나즈는 이 책에서 ‘현상학적 환원’이 어떻게 이 네 명의 거장들을 관통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개념과 방법을 통해 현상학이 어떻게 현대철학의 혁신에 이바지했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 준다.
20세기 초중반 현대철학의 혁신에 기여한 현상학은 20세기 중후반을 경유하며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 미셸 앙리(Michel Henry) 등의 걸출한 철학자들과 만나며 21세기를 위한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존 연구가 개별 사상가들의 단편적 소개에 그쳤던 한국에서 현상학의 체계와 그 발전과정을 정밀하게 조망해 주는 책을 발견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이 책은 이러한 국내 연구의 부족함을 메우며 현상학이 현대사상에 제공한 혁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21세기의 시대 흐름 속에서 철학이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줄 것이다.
현상학과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
테브나즈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현상학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일관된 사고의 줄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후설의 현상학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
다.
현상학은 무엇보다 서구 형이상학, 그 중에서도 특히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철학은 기하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인식 대상을 인식 주체와는 분리된 독립적 대상으로, 즉 역사의 모든 관계망으로부터 분리된 순수 기하학적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반면, 현상학은 대상이 주체와의 연관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기하학적 순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과 역사 속에 포착된 대상을 발견하고자 한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이때 그가 제안하는 것이 ‘판단 중지’이다. 근대철학이 가정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한 뒤에 주체와 대상, 본질과 가상의 이원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주체 속에서 나타나는, 혹은 주체의 의식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현상’을 발견하고자 한다. ‘현상’은 기하학의 탈주관적 세계도, 그렇다고 단순히 인간 심리 속에서 나타나는 탈객관적 상상물도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의 의식 속으로 ‘사건’처럼 들어와 진리의 빛을 비춰 주는 것으로, 오직 주체와 주체, 그리고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고 전환은 서구 형이상학/근대철학의 범주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고, 테브나즈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설정이야말로 현상학적 방법이 갖는 핵심을 규정한다.
테브나즈는 이러한 해석에 따라 후설로부터 시작된 현상학이 그의 계승자들을 통해 어떻게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며 전개되는지 분석한다. 여기에 20세기 존재론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마르틴 하이데거, 그리고 프랑스 현상학의 선두 주자이자 정치적 실천 차원에서 상호 논쟁을 거듭했던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있다.
하이데거와 현상학적 존재론
앞서 봤듯이, 현상학은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판단 중지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내가 보는 대상이 나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대상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존재방식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현상학은 존재론의 지평으로 확장된다. 테브나즈에 따르면, 현상학적 존재론의 서막을 연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존재론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가 보기에 근대철학의 선구적 물음인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빠져 있는 것은 ‘나’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물음이었다. 그는 현상학적 환원의 문제의식을 통해 그 ‘나’가 결코 아무런 매개 없이 그냥 독립적으로(순수 기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파악한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새롭게 정의하는 개념이 바로 현존재라는 뜻의 ‘Dasein’이다. ‘거기에’라는 뜻의 ‘da’와 ‘있음’(존재)이라는 뜻의 ‘Sein’을 결합한 이 개념은 인간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관계망 속에서(거기, da) 존재함을, 즉 인간의 존재방식이 항상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그 환경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세계’에 기반함을 지시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이데거는
현존재(인간)에게 다가오는 현상의 ‘부름’ 혹은 현존재에게 진리의 빛을 던져 주는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테브나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근본적으로 후설로부터 시작된 현상학의 전통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함을 확인한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모든 형이상학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 그 판단 중지를 통해 하이데거는 인간의 인식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존재방식의 물음을 전개한다.
프랑스 현상학의 전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현상학적 사유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거쳐 프랑스로 전파되며 강력한 부흥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부흥기 속에서 20세기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존재와 무』(l’Etre et le N?ant)와『지각의 현상학』(Ph?nom?nologie de la perception)이 출간됐다.
테브나즈가 사르트르의 현상학을 설명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점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이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에 매우 충실했으며, 따라서 전후 프랑스에서 유행한 실존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테브나즈는 사르트르의 사유의 핵심을 그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인식가능성의 조건으로 ‘무’의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찾는다. “코기토는 너무 많은 것을 보증한다”(본문 73쪽에서 사르트르의『자아의 초월성』 재인용). 사르트르의 이 문장은 곧 근대철학이 ‘생각하는 나’(코기토)를 결코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점, 그 자체로 그것이 어떤 모순도 갖지 않는 내적으로 충만한 것이라고 가정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주체의 의식 속에서 그 생각하는 나를, 즉 ‘자아’를 내던지고자 한다. 자아를 의식 속에서 비워 내는 이러한 무화(無化)를 통해 의식은 그 어떠한 내적 속성도 갖지 않게 되며, 따라서 본질이라고 가정된 그 무엇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테브나즈는 이러한 사르트르의 무(화)의 작업이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중단시키는 현상학적 환원의 과정이며, 인간의 내적 충만함과 인간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실존주의 사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테브나즈에 따르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사르트르가 ‘무화’를 통해 수행하고자 한 환원의 방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그에게 환원은 ‘무화’를 통해, 즉 비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메를로퐁티로 하여금 단순히 근대철학의 ‘코기토’ 개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고, 그 역사의 의미와 연루된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인간 인식의 가능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는 무화된 의식에 주목하는 사르트르와는 달리 이 충만함과 만나기 위해 논리 이전의 경험의 지층으로, 즉 의식 이전의 지각의 지층으로 내려가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바로 그것”(본문 98~99쪽에서『지각의 현상학』 재인용)이며 우리 앞에 실재하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 그 자체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한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의식에 의한 명료한 인식이 아니라 지각에 의한 끊임없는 애매성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게 된다.
테브나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메를로퐁티가 인간 존재에게 다가오는 현상 그 자체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후설로부터 시작된 현상학은 철학자마다 각기 다른 개념과 범주를 통해 전개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근대철학이 낳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극복하고 현상의 투명성에 주목하고자 했다. 바로 여기에 테브나즈가 말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적 혁신이 놓여 있다.
21세기에 현상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
한국에서 현상학은 전후 실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수용되었다. 그러나 정작 현상학이 갖는 철학적 고유성이 무엇인지는 엄밀하게 파악되지 못한 채로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봤듯이, 테브나즈는 현상학의 핵심을 현상의 투명성에 접근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두었고, 이는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뿐만 아니라 전후 허무주의의 기운 속에서 전파된 실존주의와는 또 다른 존재론적 사유의 지평으로 확대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현상학은 인간이 세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세계에 대해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따라 현상학은 근대철학과 단절하고자 한 20세기 현대철학의 사고 기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철학은 하이데거의『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 대한 주석”이라고 한 누군가의 말처럼,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그리고 메를로퐁티 등으로 이어진 현상학적 사유는 인간의 인식가능성과 존재가능성을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통해 의문에 던짐으로써 현대철학의 혁신에 거대한 밑거름을 제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현상학의 역사가 한 세기 지난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와 경쟁의 논리 속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마저 사라져 가는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진리를 위한 새로운 해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테브나즈의 해설 속에서 우리는 현상학적 사유의 근원을 파악하고, 21세기의 새로운 사유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현상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인식가능성과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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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현상학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판단하고, 확증하고, 꿈을 꾸고, 살아갈 때 등에 우리가 정신에서 가지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무엇인가? 따라서 현상학은 결단코 외적 사실들 내지 내적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반대로 현상학은 잠정적으로 경험에 침묵을 고하고, 그 주의를 오로지 단순하게 의식 안에서의 현실성, 요컨대 후설이 이념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식을 통하여, 그리고 의식 안에서 지향되는 한에서의 대상으로 그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상적 실재성이나 실재적 내용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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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에게서 현상학은, 단지 한 가지 방법의 연속성 안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지양이었다. 여기서는 지양의 현상학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학은 곧 형이상학이 되지만,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을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간주한다. 기초존재론은 여기서 괄호 치기나 형이상학의 정초에 이르기 위해 형이상학을 ‘환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과업 자체를 비난한다. 마찬가지로 정복한다는 의미를 갖는 극복(?berwinden)은 더 이상 현상학과는 무관한 자명한 의도를 보여 준다. 플라톤 이후로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형이상학이 됨으로써 그 길을 잃어버렸다. 철학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자에 그 스스로 도달하려고 집착한 탓에 존재를 상실하고 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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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다시 말해 심리학적 자아(moi)는, 연속하는 환원이 일어남으로써 세계를 향한 의미의 원천이자 의식의 지향성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나타나는 초월적 자아에 대한 환원 아래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반대로, 사르트르는 현상학에서의 의식이 지향성을 통해 정의되기 때문에 초월적 자아의 부산물은 잉여적인 것이며, “자아의 통일하고 개별화하는 역할은 전적으로 무익하다”고 본다. “초월적 자아, 이것은 의식의 죽음이다.”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세계뿐만 아니라 자아 자체에 대한 철저한 환원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자아는 세계로 던져져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여전히 다른 모든 대상들처럼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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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5 |
사르트르가 정의한 자유, 곧 지속적인 분리란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는 “세계에 속해 있는 우리의 보편적 참여의 부정적인 측면”(p.501)에 다름 아니다. “나의 자유는 언제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면서, 언제나 공존재(complice)로 있는 것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자유의 힘은 세계 속으로의 나의 보편적인 참여에 의거한다. 나의 실질적인 자유는 나의 존재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다시 말해 사물들 속에 존재한다”(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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