形而上學 (형이상학 Metaphysics)
영어 낱말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그리스어의 메타(meta: 뒤)와 피지카(phy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라틴어 의 역어로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부문을 "제1철학"이라 하고
동식물 등을 연구하는 부문을 "자연학"이라 했다.
그가 죽은 후 유고(遺稿)를 정리·편집함에 있어
제1철학에 관한 것이 "자연학" 뒤에 놓여
그때부터 메타피지카(metaphysika: 형이상학)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동서양의 견해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차이로는
서양의 경우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견해가 많은 반면,
동양의 경우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다는 견해가 많다.
서양의 형이상학
서양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다.
볼프는
철학을 표상력(表象力)에 의한 형이상학(이론)과 의욕력에 의한 실천철학(실천)으로 나누었다.
칸트가 형이상학이라 칭하는 것은
주로 볼프를 따르고 있으나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는 독단적이라 해서 배척했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르며
인식론에 기반을 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헤겔에 와서는
형이상학이 회복되어
사유(思惟)의 형식이 동시에 실재의 형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논리가 주장되었다.
형이상학을 주장했으나
객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각존재의 의미이다.
변증법에서는
형이상학이 자기에게 대립하는 것을 고정시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동양의 형이상학
서양에는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선입견이 있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진리들은
사색 · 추론, 또는 근거 없는 신념 또는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모든 사상 체계는 서로 간에 대립 또는 모순되어,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인간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알기 위해
사색 · 추론 · 신념 또는 신앙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 여러 가지 해석은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며
각각의 해석은 다양한 종교적 · 사상적 · 철학적 배경 또는 경향성을 가진
여러 다른 사람들 중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끔에 있어
특히 적합하다고 본다.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문제들
심적 제반현상의 개념들을 분석하고
나아가 물적 현상의 개념들과 비교·분석하는 학문.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자기동일성의 문제
사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는 아무개로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이 이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가?
계속적으로 동일한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답이 될 수 있다(인체).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문제점이 있다.
우선 육체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대체되면서 바뀌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전 기관이 이식되고 있어
예전의 신체가 지금의 신체와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다음으로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만약에 두 사람의 뇌기관을 서로 바꾸었을 때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기억력과 믿음과 인격성과 성격적 특성,
사유나 행위에 있어서 능력이나 습관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신체에 근거한 자기동일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과거에 어떤 것을 했던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신체가 동일하다는 데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비슷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판단한다.
각자의 자기동일성,
즉 그 사람이 언제나 그 사람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신체적 조건에 기초할 수도 있고
심리적 조건에 기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기준은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신체적 기준에서 보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심리적 기준에서 보면 바로 그 사람이라는 판정이 내려지게 되는 경우이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 Die Verwandlung〉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몸이 완전히 벌레로 변해버린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의 가족은 그를 모두 알아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옛날의 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한 사람의 동일성을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
신체적 기준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고,
그렇다고 심리적 기준에 입각하는 경우
그러한 것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정식화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이 두 기준 모두를 용인하여
이들이 서로 상충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다.
개인의 불멸성
인간의 육체가 현실적으로 기능을 멈추어도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은 계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심리철학에서는 물론
이러한 믿음을 그 사람의 업적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가 사람들 속에서 기억된다는
그런 의미로 축소시키고자 하지만,
여전히 자기동일성으로서의 불멸성을 믿고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불멸성의 문제는
심신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가령 심적 용어는 제거되어 물적 용어로 옮겨질 수 있다든지,
신체적 기준에 의해 각자의 동일성이 확보된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의 경우
죽은 후에 생존한다는 개념은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은
사후생존의 개념이 가지적(可知的)이기 때문에
유물론자의 이러한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중추상태이론이나 동일성이론조차도
사후생존의 개념을 가지적인 개념으로 인정한다.
이들은 많은 이원론자들,
특히 부현상론자나 심리적 병행론자들과 의견이 일치한다.
심지어 상호작용론자도 중성적 일원론자처럼 사후생존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거나 거절한다.
한 철학자가 사후생존이라는 것이 가지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발생한 적이 있는가 하는 더 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이 불가분할성으로서
불멸한다고 선험적으로 주장했고,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원리에 근거해서
영혼의 불멸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험적 논변도
가지적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그리 큰 설득력이 없다.
적어도 설득력이 있으려면
경험적 데이터가 요구된다.
사후 생존자가 있으면
그것에 대한 직접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생존자가 없다면 그러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관한 지식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즉 자기 자신의 의식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의식이 아니라는 믿음의 상태이다.
누구나 제정신이라면
자기 자신의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유아론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주장을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자기동일성과
사후생존의 문제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련되어 있다.
만약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자나
비유물론자들이 없다면
이들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개인들이 이따금 다른 사람들의 의식상태를 텔레파시를 통해서
아니면 공감이나 사회적 교감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알아차린다고 주장하며,
칸트나 스트로슨은
초월적 논증에 입각하여
어떤 사람이 그가 타인의 마음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의 마음의 존재도 확신할 수 없다고 본다.
유비적 추리를 통하여,
즉 자기 자신의 육체와 행동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타인의 육체와 행동 사이의 유사성을 추리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한 사람의 마음이 자기 자신의 육체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지듯이,
타인의 마음도 타인의 육체와 연관되어 알려질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타인들의 육체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
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능력 또는 정보를 말하거나 전달하는 능력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은 작용하는 타인의 마음을 요청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 어떤 논증도 모든 사람이 수긍할 만큼 설득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나아가 보다 관찰가능한 방식으로 논의를 풀어나가기 위해
정신을 유물론적으로 처리한다는 것도
이미 앞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문제를 안고 있다.
인공지능
초고속 전자 컴퓨터의 괄목할 만한 진보는
많은 철학자로 하여금 충분한 기억능력을 갖춘 컴퓨터가 인간처럼
지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인공지능이란 용어는
이와 같은 역량을 갖춘 컴퓨터를 개발하고자 하는 탐구영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분야에서 2가지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첫째,
인공지능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에 이론적 한계들이 무엇인가이다.
컴퓨터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만큼 광대한 능력을 갖고 있는 컴퓨터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단언적 주장은 현명하지 못하다.
둘째,
미래에 인공지능 분야가 최대로 발전되었을 때,
그 컴퓨터가 인간처럼 정신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정신의 단순한 모방에 불과할 것인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에 대해서 기억하고 추리하는
이러저러한 언어를 이해한다고 자연스럽게 일상언어로 쓰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그 자체로 진리인가 아니면 은유적인 사용에 불과한가?
일부 사람들은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유활동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기계이므로
컴퓨터도 인간과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문제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밝혀내는가
그렇지 않으면 컴퓨터가 인간정신의 한계에 도달하는가에 달려 있다.
- 브리태니커 J. A. Shaffer 글에서
形而下學(형이하학 physical science)
형체를 갖추고 있는 사물에 관한 학문이다.
形而下(형이하)란
形而上(형이상)에 대응되는 말로,
시간·공간 속에 모양을 갖추고 나타나서
감성적인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영어의 'metaphysical'을 형이상으로,
'physical'을 형이하로 번역하는데,
이 용어는 〈주역 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취한 것이다.
물리학·동물학·식물학 등이 형이하학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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