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석박사과정]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읽기Ⅰ 시간, 습관, 기억

한신학 han theology 2017. 2. 25. 16:31
이 강의는 칸트, 니체, 베르그송, 프로이트 등의 시간론을 배경으로 해서 『차이와 반복』2장에서 전개되는 시간, 무의식, 반복의 문제를 독해한다. 우리의 강의는 특히 주체론에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해 시간의 종합과 주체의 형성을 핵심 주제로 하고 무의식과 반복의 문제를 핵심적인 매개로 해서 들뢰즈의 주체론을 읽는다.

들뢰즈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차이와 반복』   


현대철학의 입문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철학자인 들뢰즈. 현대철학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들뢰즈의 이름만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현대철학의 또 다른 거장인 푸코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를 묶어 ‘철학극장’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썼다. 그 첫 문장은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였다. 푸코의 예언이 맞아 들어간 것인지, 20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들뢰즈 철학의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언어학 등 수많은 영역에서 자신이 창안한 개념을 적용해 철학의 변모를 꾀했다. 그 중 푸코를 비롯한 당대의 평자들에게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들뢰즈의 주요 저서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사상이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철학사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한 책, 『차이와 반복』으로 들뢰즈 철학의 정수를 맛보자. 프랑스 철학의 전문가로써 들뢰즈 철학의 편안하고 속 깊은 길 안내자가 되어 줄 철학자 이정우와 함께.

    


차이의 긍정, 생성으로서의 차이    


들뢰즈는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모네의 그림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계절, 시간, 기후,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들을 그렸다. 
위의 사진은 모네의 루앵 성당 연작들이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빛을 포함한 여러 조건들에 의해 루앵 성당은 시시각각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차이’가 있었다.
들뢰즈는 이 점에 주목한다. A가 A′로 변화했을 때 그 둘의 공통인 A는 반복된다. A가 A′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만일 A와 A′가 완벽하게 동일했다면, 즉 차이가 없었더라면 A는 더 이상 반복될 이유가 없다. 모네의 경우로 말하자면, 더 이상 루앵 성당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그러나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두 반복은 헐벗은 반복과 내적이며 풍요로운 반복이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내적 반복과 외적 반복의 구분은 차이를 낳느냐 낳지 못 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역으로 차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반복이 있다. 또한 그래서 차이와 반복이 뫼비우스띠처럼 얽혀있다. 
 

- 7강 강의노트 中   차이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천덕꾸러기처럼 생각되어왔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논리로 정해진 일관된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는 사회 통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이 소수자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있다. 그것은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생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속의 무수한 ‘차이’에 대한 삶의 지침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다양한 차이를 마주하게 된다. 나와 다르다는 ‘차이’를 대면했을 때, 그것은 공포로 혹은 혐오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 예로, 몇 해 전 트랜스젠더 가수 하리수가 데뷔했을 때 연예계가 들썩였던 것을 기억해보자. 다수가 이성애자인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이질적 소수자가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초기 대중들이 내보였던 경악은 곧 동성애자 ·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졌다. 
들뢰즈 철학은 우리 삶 곳곳에 적용될 수 있다.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관용이나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리수가 일반 다수와 갖는 변별점, 즉 차이를 계기로 사회가 조금은 변화되었고, 그것이 질적으로 더 나은 생성이었다면 우리는 차이 나는 것들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묘미다.

 

당신이 들뢰즈 철학을 만난다면, 이전의 당신과는 어떤 차이를 갖게 되고 또 무엇을 생성해낼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을 꼼꼼히 짚어 주는 이정우의 <들뢰즈 철학의 정수:『차이와 반복』읽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