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 들꽃다회 - 하나
/ 20140927~28 토,일요일, 맑음 & 해무
> 여행정보 > 명산등반 > 마니산
마니산 역사탐방
소재지
화도면 전지역, 산높이 : 472.1m
산행안내
강화도 남서단에 위치하고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마니산이 단군이 제천할 정도의 명산으로 용이 승천하고 용마가 나왔으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72대 왕후장상이 나올 곳이라 한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하신 참성단이 있으며
‘88 세계 장애자 올림픽을 비롯 매년 전국체전시 성화를 채화 봉송하고 있는 민족의 영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91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노라면
서해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으며,
동쪽 기슭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지은 정수사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다.
등산안내
1코스 : 화도버스종점-참성단, 연장 : 약2.4km , 소요시간: 약 48분
2코스 : 매표소-정수사, 연장 :약5.1km, 소요시간: 약 1시간 42분
3코스 : 매표소-함허동천, 연장 : 약5.1km, 소요시간 : 약 1시간 42분
입장료
- 어린이 개인 700원 / 단체 500원
- 청소년, 군인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 어른 개인 2,000원 / 단체 1,300원
- 문의처 : 마니산 관리사무소 (032)930-7068,9
찾아가는 길
- 강화대교→알미골 삼거리에서 좌회전 84지방도→찬우물삼거리에서 우회전→인산삼거리에서 좌회전→마니산
- 초지대교→초지진→ 84번지방도 →길상면사무소 →화도면사무소 → 마니산
- 강화군 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서.....
***** 조정된 현재의 입장료로 수정함.
화도면 상방리 마니산국민관광단지 관리사무소 근처 공원의 대추나무
가을을 알리는 감나무
공원에서 쉬고 있는 등산객들
마니산국민관광단지 공원에서 연주 봉사하시는
갑비고차관현악단
* 갑비고차(甲比古次)
- 고구려 때 강화도의 옛 지명으로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하죠.
그러면 갑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 배를 ‘갑절’, 겹창을 ‘갑창(甲窓)‘이라 하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됩니다.
곶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지명형태소이죠.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 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 다음 지식에서...
참성단 올라가는 계단로와 단군로가
갈라지는 삼거리 앞 공원로에서....
모처럼 야생화전문가 오병훈 선생님과 단체 들꽃답사가 아닌 개인적인 산행을 하다.
오 선생님(왼쪽 흰모자 쓰신 분)은 들꽃문화와 관련된 책을 20여권 발간한 분이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꽃이 있는 삶>상하권, <살아 숨 쉬는 식물교과서> , <서울의 나무> 등이 있다.
마니산의 고도가 낮은 곳은
산벚나무, 단풍나무, 참나무류 들이 자라는 활엽수림이다.
전나무, 소나무 등과 함께 혼효림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계단로와 단군로 삼거리 조금 지나서 있는
침사지(沈沙池)와 아치교
다래덩굴을 올린 그늘집
물에는 낙엽이 쌓여가고...
사태방지용 침사지 보(洑)
까치박달나무
- 기도원 올라가는 대로와 참성단으로 가는 계단로 삼거리에서...
팥배나무
팥배나무와 듬성듬성 구름 낀 가을하늘
기도원으로 가는 신작로와 참성단 계단길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졸참나무, 단풍나무와 가을하늘
마니산의 자생식물 안내판
붉노랑상사화는 정수사 입구 산록에서 자라며
개체 보호를 위하여 금줄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최영장군이 칼로 내리친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바위,
- 지중응력과 하중제거라는 자연현상으로 생겨난 절리(節理)이나
몽고란 때의 강화도로 천도와 역성혁명으로 멸망한 고려왕조에
대한 그리움이 이러한 전설을 낳게 하였나 보다.
까실쑥부장이
이고들빼기
개여뀌
뱀딸기
기도원 건물 뒤켠 경사지의 신갈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에 이미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나도기름새
<주간 조선>에서 측정계기를 사용하여 마니산의 기(氣)를 측정하여 보니
전국 산의 평균치 보다 휠씬 높았고 그중에서
마니산 정상 부근과 참성단의 기가 제일 높게 나왔다는
안내판이 아래 사진에 있다.
흰구름버섯??
화암 유형석의 시(詩)
화암(華菴) 유형석(兪衡錫) : - 강화도 출신 학자.
수많은 시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는데 ,
80년대에는 전국노인백일장에 참가 서예부분 등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러한 엘로드법이라는 측정방법이
L자형으로 생긴 막대를 손에 들고 회전수를 측정하는 것 같은데
얼마나 정량적인 측정이 되는지 의문이 든다.
이 L자형 막대의 회전수가 어떠한 정성적인 의미를 갖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러한 원시과학적인 방법으로 마니산의 기(氣)를 홍보하기 보다는
북쪽 건너편 진강산 서쪽능선 자락에 하곡(霞谷)의 묘소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다,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선생님의 양명학(陽明學)에서 발전하여
한국의 기철학(氣哲學)의 마지막 대가이신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9)로 이어진
강화학파(江華學派)와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붙인다면 양명학 발상지로서 역사적인 사실과 민족자긍심의 고취 등
더 좋은 자연교육의 장이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 후기에 정제두를 비롯한 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해 이어진 학문 유파(流派)다.
하곡은 자신과 가까운 소론(少論)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했는데,
그 뒤 친인척인 이광사, 이광려, 신대우, 심육, 윤순 등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이 학단은 이후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강화학파는 구한말 영재 이건창과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창강 김택영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아래 사진의 마니산 등산안내도에서
현위치라고 붉은 글씨로 표시된 지점 부근의 너럭바위 위에서
가릉포평야 건너편 진강산 서쪽 능선 끝자락에 있는
하곡 정제두 선생님의 묘소가 바로 보인다.
꽃구름버섯의 어린 개체군
효능 : 거풍제습(祛風除濕), 윤폐지해(潤肺止咳), 화농생기 (化濃生肌) 肌: 살가죽 기
약리작용 : 항종양( Sarcoma 180 / 마우스, 억제율 90%.
Enrlich 복수암 / 마우스 , 억제율 80%
Yoshida 육종 / 흰쥐 )
항균( 화농성 구균, 뇌막염 쌍구균 ) .
진해작용
적응증 : 풍습병, 기침, 폐질환, 화농
***** 이런 보잘 것 없는 1년생 백색 부후성 버섯에서도
항암성분과 항균성분을 추출하여 동물실험을 통하여
난치병에 대한 약재개발 연구를 하고 있다니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기 앞서서, 질병과 약재를 함께 보내주신
조화옹의 크신 배려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석주 권필의 시(詩)
마니산을 노닐며 - 관등행을 운자 삼아 짓다
(유마니산 용관등행운 遊摩尼山 用觀燈行韻)
/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
마니산고고삽천 하고 摩尼山高高揷天
상유요대유우선 하도다. 上有瑤臺遊羽仙
계화소일지기중 하고 溪花笑日知幾重
간송열세해천년 이로다. 澗松閱世皆千年
위봉발지기세웅 하고 危峯拔地氣世雄
절정사월다한풍 이로다. 絶頂四月多寒風
서남헌활안력궁 하고 西南軒豁眼力窮
벽해만리함청공 하도다. 碧海萬里涵靑空
잘 다듬은 화강암계단
- 계단의 한칸 높이가 꽤 높은 편으로 마니산의 경사가 급한 것을 알 수 있다.
후포선착장 부근 풍광
산부추
마니산 계단로 등산 안내도
석모도, 교동도,화도면 소재지,
가릉포평야
진강산(441m), 덕정산(320m 부분), 정족산(220m 사진 우측 소나무 위)
길정저수지, 길상면 소재지(온수리), 김포와 강화 사이의 염하(鹽河)
배경의 희미한 산이 황해도 개풍군, 그 바로 아래가 한강 입구
인천카톨릭대를 품고 있는 진강산
붉게 익어가는 팥배나무 열매
마니산 계단길 중턱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
- 왼쪽부터 석모도(부분), 교동도, 강화도내 덕산,별립산, 진강산(441m)
양도면 읍내 뒷편인 진강산(사진 우측부 높은산) 봉우리에서 서해로 뻗은
능선부 서쪽 끝부분에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이신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
계단길 중턱 잘 다듬은 돌계단길 바로 아래에 있는 너럭바위에 올라
하곡 선생님의 묘소를 바라보며 표일배에 가져간 차를 나누고
청성곡(淸聲曲)을 연습하다.
몇몇 등산객이 있어 가곡 <보리밭>을 덤으로 연습해 보다.
**** 한국철학사상사 ****
제9장 양명학의 수용과 전개 양상
1. 양명학의 전래와 수용
1)양명학의 사상적 구조
기존 관학인 정주학이 당시의 우기를 극복하는데 무력함을 예민하게 느꼈던
사상가가 바로 양명 왕수인(1472~1528)임.
양수인이 무엇보다도 불만스럽게 여겼던 것은 주자학이
“심과 이를 둘로 나누어 ‘지리’하게 되었다”는 것임.
주자학은 궁리를 지에 가두고 이것을 행과 분리시켰기 때문에
지리한 폐단을 낳았다는 것.
양명학은 심즉리설 치양지설 지행합일설.
정덕 3년 귀양살이 중 용장에서 심즉리를 깨닫게 됨.
그가 말하는 ‘심즉리’는 심이 이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심(心)이 이(理)인 것이며,
‘심리위일(心理爲一)’은 심과 이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라는 것.
2)양명학의 수용과 배척
1521년에 ‘전습록’의 초간본이 전래.
명종 대를 지나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왕수인의 책을 접하게 되고 큰 거부감 없이 관심을 지녔음.
이황이 양명학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비판을 가하자
이것이 곧 전체적인 의견으로 굳어지게 됨.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어서 양명학은 정통사상의 주류에 끼일 수 없었음.
이황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양명학 비판의 선봉에 서자,
양명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조는
“이황의 말에 의혹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의 문인 및 후학들이 ‘전습록논변’에 의지하여
양명학을 비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함.
2. 양명학파의 성립과 전개
1)양명학파의 성립
계곡 장유(1587~1638)는 학자들이 양명학을 거의 맹목적으로 배척하여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한 학문의 자율성과 개방성을 요구.
조선의 양명학파는 동강 남언경과 이요에게서 그 조짐이 보이지만,
조선 양명학의 선구자격인 지천 최명길(1586~1647)과
장유에 이르도록 학파가 성립되지 못함.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하곡 정제두(1649~1736)와 그 문도들에 의해 학파가 성립되어 가학의 형태로 계승.
정제두는 정주학을 두루 연구하였으나
왕수인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격물치지에 의심을 품었고
이를 양명학을 통해 해결하려고 함.
2)정제두의 양명학
정제두는 무조건 ‘반주자(反朱子)’의 자세를 취하지는 않음.
정제두는 ‘마음이 곧 이’라는 입장에서 사물에서 이를 구한 주희의 격물치지론을 비판.
참된 것과 망령된 것이 함께 들어있는 생리 가운데서 참된 체를 주로 삼는것,
즉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정제두의 학문 목표.
생리 가운데 선한부분인 진리가 바로 명덕.
정제두의 이기일원론은 주희의 이기이원론과는 다름.
주희는 인식론적관점에서 심(心)과 물(物)을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방식으로 맞대어 놓았지만,
정제두는 ‘심즉리’, ‘현상즉본체’라는 입장에서 주희의 방식을 거부.
정제두는 또 양지의 ‘치’가 곧 ‘행’이라고 보고,
이것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일체의 공부와 수양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봄.
그러므로 본체의 양지를 사사물물에서 ‘치’하는 것이 바로 지행합일.
반드시 먼저 외물을 격(格)하여 지(知)를 이루고 난 다음에 능히 행동할 수 있다는
주희의 선지후행설과 비교해 볼 때 정제두의 지행설이 보다 간이 적절한 공부론이라 할 수 있음.
3) 정제두 이후의 양명학자들
덕촌 양득중(1665~1742)은 윤증·박세채·정제두에게 배웠음.
영조로 하여금 ‘실사구시’넉자를 벽에 걸고 늘 바라보도록 청함.
홍대용·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거장들도 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내면적으로 양명학의 영향에 공감을 얻었을 것임.
항재 이광신(1700~1744)은 정제두로 부터 양지학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그는 스승 정제두가 주자학과 양명학 중 어느 한가지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고 강조.
이광신도 도한 주자학과 양명학의 분기점이 ‘대학’의 ‘격물’을 해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주자학과 양명학의 절충을 시도.
초원 이충익(1744~1816)은 이영익과 (1738~1780)과 양지학을 강론.
가가 오래됨에 가습이 습성화된다고 함.
영재 이건창(1852~1898)은 고문에 뛰어나 여한십대의 한사람으로 꼽히며,
그의 당의통략은 당쟁사를 비교적 공정하게 서술한 것으로 평가.
‘시심당기’에서, “지금의 백성이 옛날의 백성이요,
지금 백성의 마음이 옛날 백성의 마음이다.”고 하여 심의 보편성을 강조
난곡 이건방(1861~1939)은 이건창과 함께 학문을 탁마.
사람의 정에 합당하는 것이 진이요,
성현의 도에 합당하다는 것은 인간의 정에 합당하다고 주장.
정제두 이후 근 1백여년 동안 양명학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음.
백암 박은식(1859~1925)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음.
같은 시대의 다른 애국계몽 사상가들과는 달리,
그는 양명학에 의거한 유교구신을 주장하고 대동사상을 제창.
위당 정인보는 양명학과 한문학을 수학하다가
1913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고
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참가하여
독립운동과 동포의 계몽에 힘씀.
정인보에 의하면 진과 실은 하나로 직결되는 것이었으니,
양명학이 곧 실학으로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과
그 개념상의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깊은 유기적 연관을 갖고 있음
3. 한국 양명학의 특성과 의의
실학파와 개화파의 가교자라 할 수 있는 혜강 최한기(1803~1877)가
양명학을 크게 칭송하고 또 김옥균(1851~1894)·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 인사들의 막후에서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하여
‘백의정승'으로 불렸던 대치 유홍기(1831~?)가
양명학과 불교에 심취했던 사실은 간과 할 수 없을 것임.
이러한 사상적 맥락이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였던 김택영·박은식 등이나,
일제강점기에 국혼을 환기하고자 노력했던 정인보 등에 면면히 이어짐.
조선후기의 권철신·정약종·정하상 등 신서파는 양명학을 통해
천주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였음.
양명학은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교량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
시라솔's Blog 자료 중에서.....
*****
양명학은 16세기 초 중국의 왕수인이 만든 사상이다.
주자학은 원나라 이후 관학이 되면서부터
오히려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놓침으로써 학문적 생명력을 잃어 갔다.
특히 15세기 중반 명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주자학은 이러한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이 같은 상황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구로 이어졌다.
[출처] 하곡 정제두-김교빈의 철학 에세이-|작성자 rnhgn0g17595
몽고족 출신의 원나라 때에 성리학과 주자학을
국가통치 이념의 기본인 관학(官學)으로 삼고 있었는 데 비하여,
동이족의 한 갈래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양명 왕수인의 양명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청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한반도 내의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을 도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병자호란 등 두차례 호란을 일으킨 청을 같은 동이족의 갈래임에도
오랑캐라고 무시하여 청이 중시한 양명학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원땅을 점령하자 조선이 소중화(小中華),
더나아가서는 조선이 중화(中華)라고 주장하며,
주자학의 중심이 조선 땅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에서 꽃피웠다고 까지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자학 우위의 토대 위에서 강화학파 중심의 하곡 정제두,
혜강 최한기 선생님 등이 이 양명학을 받아들여,
소수파의 학문(家學)으로 맥을 이어 나갔다.
하곡 정제두 선생님이 강조한 심즉리(心卽理)라는 개념은
불교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이나 선도리(禪道理)와도 일맥상통하고 있고,
당태종 때 전래되어 몽고족 대칸이나 칸의 부인들이 독실하게 믿고 있던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景敎)의 하늘숭배새상이 양명학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에
후에 실학과 천주교, 개화사상을 거침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적 토대과 배경을 제공한다.
조선조 후기에 양명학은 비록 소수가 이어온 가학(家學)의 형태를 띄었지만
이전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중심의 성리학의 발전기와
그 이후에 나타난 실학사상의
중간점에서 실학의 발달과 천주교인 서학(西學)의 등장,
그리고 후에 개화파의 등장을 위한 중간 가교역활을 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정제두가 만든 강화학파가 대일항쟁기에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서는
아래에 인용한 김교빈의 <철학에세이>에서 잘 나타난다.
정제두의 철학은 강화학파로 이어졌다.
강화학파는 주자학에 내몰려 강화도까지 들어 간 정제두를 따르는 몇 집안들이
사제관계와 함께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동지적 유대를 강화해 갔다.
그리고 정제두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양명학 탐구에만 머물지 않고
시문, 국사, 국어, 문자학, 경학 연구로 다양하게 전개해 갔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마음 안에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학문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강한 실천 속에서 구도자 같은 삶을 살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개인 주체를 강조했던 정제두의 가르침을 민족주체의식으로 확장시켜 간 것이다.
이 같은 주체의식이 훈민정음 연구, 역사연구, 경학연구 등으로 나타났고,
고구마 싹을 얻어다 민중의 배고픔을 구하려 했던 노력이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을사년의 수모를 당하자 강화학을 이어받은 이건승은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재산을 다 털어서 ‘계명의숙’을 강화에 세운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직후 강화를 떠나
진천에서 출발한 홍승헌과 개성에서 만나 압록강을 넘는다.
만주 흥도촌에는 두 달 앞서 출발한 정제두의 6대손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 안동을 떠난 이석영, 회영, 시영 등 형제가 합류하였다.
그들의 회동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시작되고
그 속에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의 항일 무장투쟁이 이어져 나왔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정제두의 학문과 거기에서 피어난 강화학파는 근대를 여는 등불이었다.
- 김교빈의 철학에세이에서 발췌.....
[출처] 하곡 정제두-김교빈의 철학 에세이-|작성자 rnhgn0g17595
▲ 묘제 봉행
장면 |
[인천=문찬식 기자] 인천시 강화문화원(원장 우광덕)이 한국양명학회와 함께
2014년10월10일 오전 11시 양도면 하일리 정제두선생 묘역에서
서세(逝歲) 278주기 하곡 정제두선생 묘제 봉행 행사를 거행한다.
- 시민일보 기사 중에서 발췌....
마니산 단군로 능선코스, 후포선착장,화도면 소재지
고려시대 때부터 간척사업하였던 가릉포평야
바다 건너편이 삼대 관음성지인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 교동도
+++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騎) 선생님의 기측체의(氣測體義)+++
천지에 가득하고 물체에 스며들어 모아고 흩어지는 것,
모이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것은 기(氣)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낳기 전에는 오직 천지의 기(氣)만이 있는데
내가 낳아진 처음부터 비로소 형체(形體)의 기가 있게 된다.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 천지의 기(氣)에로 되돌아 간다.
천지의 기는 커서 오래 존재하고 형체의 기는 작아서 잠시 후에 없어진다.
그러나 형체의 기는 천지의 기에 자질을 의뢰해서 생장한다,
여러 구멍을 따라서 음식과 성색(聲色)에 통하고
사지의 몸으로부터 운용하며 접하고 교섭하여 통한다.
그 비롯됨을 따라서 뒤를 체험하고 그 앞을 추리하여 그 뒤를 헤아린다.
무릇 여러가지 분별로 비교하여 체험하면 드디어 지각(知覺)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말미암아서 확충하면 만물의 기에 이르기까지
천지로부터 하나같이 품부(稟賦)된 것이다.
두 가지 사이에 기르면 장차 그 기미(氣味)와 성색(聲色)도
서로 통하는 기틀이 되어서 그 대략(大略)을 밝게 다 갖추게 된다.
그 같음을 따라서 그 다름을 구별하고 그 근원을 들어서 그 곁가지를 구명함에
어찌 다를 것이 있겠는가!!!
***** 신기통초(神氣通抄) 1. 체통(體通) (1), 천인(天人)의 기(氣) 중에서...
이글은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의 번역을 기본으로 하였읍니다.
** 한국의 기철학(氣哲學)은 화담 서경덕 님을 종(宗)으로 하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그 아들 신독제 김집(愼獨齊 金集)
님들이 중심이며 이를 잇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계에서 크게 정립되었다.
한국 기학의 종점에서 하곡 정제두, 혜강 최한기(1805~1877) 님이 우뚝하셨으며,
님의 생존년대가 서학(西學)의 물결과 서세(西勢)의 동점(東漸) 등으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오늘에 님의 기사상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읍니다.
마니산 단군로 능선코스와 강화갯벌센터 앞 간사지
- 썰물 때인지 갯뻘이 넓게 나타나고 있다.
다산(茶山)과 혜강의 천관(天觀)
다산의 천관은 전지전능의 인격신적 존재로서 상제(上帝)를 떠올린 것이고,
상제는 우리 인간을 내려 보고 감시하는 ‘강감(降監)’과
잘못을 다스리는 ‘위벌(威罰)’의 권능을 행사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다산은 이 천관에 의거,
남의 시선에 뜨이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은밀한 상태에서
처신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유교적 수양론의 핵심 개념인 ‘신독론(愼獨論)’을 편다.
요컨대 세상 눈은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산에 있어 ‘탈성리학’의 귀결처는 경학의 세계였다고 하겠다.
하늘을 ‘섬기는 대상’으로 사고한 점에 있어서는 혜강도 다산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천관(天觀) 자체는 같지 않다.
혜강은 다산이 영입한 ‘인격신적 주재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내 생각...하늘을 섬기는 대상을 신으로 볼 것인가,
자연의 이치로 볼 것인가....차이가 근대와 현대 차이 아닌가 한다.
즉 다산과 혜강은 근대인으로서 사고를 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맞을 듯하나,
혜강이 다산보다 더 현대인임은 틀림 없다. ..)
“활동문화(活動運化)가 신이 됨을 알지 못하고
문득 천지에 지극한 신의 조화가 있다고 운운하다니
이는 기(氣)에 우선하여 신이 있다는 것이다.”
최한기는 이렇게 공박하면서 신이란 ‘운화의 권능’을 가리키므로
운화(運化)의 기가 곧 신(神)이라고 확신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을 부인한 나머지 자연 자체를 신으로 간주한 스피노자(b. spinoza)의 철학,
혹은 무신론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혜강은 다산처럼 먼 옛날의 경전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사라지게 됐고
성인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마니산 첨성단에서 바라본 가릉포평야 일대와 진강산
-마니산 바로 아래 마을이 화도면 소재지(이번 산행 기점)
가릉포평야 건너편이 진강산(441m)이고,
진강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 양도면 소재지.
양명학(陽明學)은 노추(魯鄒)의 유학(儒學)이 후대로 오면서
정주학(程朱學)의 발달로 지극히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적인 경향을 띔에 따라,
우주 속에서 인간, 자연 속에서 인간상을 재정립하고
당초의 유학 이념에 가까이 하고자 발달한 학문이다.
물론 이에는 명의 멸망과정에서 정주학이 세상을 유지발전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기 반성에서 출발한 새로운 학문이었지만,
부여족의 한 갈래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이를 채택함으로서
청의 관학(官學)으로 대두된 새로운 유학의 사조였다.
양명학은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태양의 밝음으로
인간사회에 따뜻함과 감화를 주자는 뜻을 가진 학문이다.
명이 멸망한 후에도 한반도의 조선에서는
정주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경향인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사색당파를 형성하고
여러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하여 나라가 각 정파별로 사분오열되었다.
이에 소론 계열의 하곡 정제두는 스승이신 박세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명학의 공부와 발전에 뜻을 두었음을 38세 때 밝히고
61세에 강화도의 선영 근처로 거처를 옮겨 양명학 연구와 발전에 매진하고
정주학에 비하여 소수자의 학문이었으나 강화학파를 만들었다.
우주와 인간 그리고 자연속에서의 인간의 위상에 대한 연구는 후에 실학의 발달에
가교가 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아래 그림의 <선원경학통고>의 우주론에서 하늘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학문적 경향은 천주교의 자생적 도입과 이를 이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천도교의 창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의 계보를 이은 혜강 최한기는 김옥균, 박영효등의 개화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을사늑약으로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백암 박은식,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하곡의 6대손 정원하는 강화에 계명의숙을 세운 이건승과
안동에서 만주로 온 이석영, 이회영,이시영 삼형제들과 손을 잡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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