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UNGEUN)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한신학 han theology 2018. 7. 5. 14:48

랑송불문학사

혁명가적 예술가—아나톨 프랑스

아나톨 프랑스

아나톨 프랑스

바레스와 마찬가지로 르낭의 딜레탕티슴에서 출발한 프랑스는, 바레스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즉, 대혁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찬성한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본명은 François Thibault)는 184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말라케 강둑에서 헌책 장사를 하고 있던 아버지한테서는 18세기에의 입문 지도를 받았고, 스타니슬라스 학교의 선생님들한테서는 그리스 문학에의 입문 지도를 받았으며, 그 후 '저 숭배할 만한 정신'인 르낭을 발견했다. 이 세 가지 영향은 평생 그의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의 생활은 지극히 평온했으며, 책 속에서 흘러갔다. 즉, 편집장, 간행자, 원고 심사원, 상원 도서관 사서, 〈탕〉(Temps) 지()의 문예 비평가 등의 생활이었다. 훗날 성공하여 부유해지자, 그의 생활은 파리의 별장과 투레느의 소유지의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의 작품은 두 개의 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드레퓌스(Dreyfus) 사건 이전의 시기이고, 또 하나는 그 이후의 시기이다. 전기는 철학적인 호기심을 가진 아마추어의 시기인데, 박식하고 애서가()인 그는, 알렉산드리아 시대에서 18세기로, 테바이드에서 생-자크 거리로, 파리에서 필렌체로 오가고, 그의 탐색자()이자 고문서 연구자로서의 취미와 재치 있고 매혹적인 사색 경향, 그리고 미묘한 예술 감각 등을 그의 모든 소설 속에 넣는다. 그는 벌써 강자들의 힘을 아이러니컬한 눈으로, 약자들의 고통을 연민의 눈으로 본다. 후기는 논쟁가의 시기인데, 이 논쟁가는 단연 약자들 쪽을 편들었고, 정의나 도리가 문제인 것 같이 보이는 때에는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풍자 감각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열정을 나타낸다. 딜레탕트의 아이러니가 신념가()의 무기로 된 것이다.

그를 인정받게 만든 책은 〈실베스트르 보나르의 죄〉(Le Crime de Sylvestre Bonnard, 1881)였다. 이 매혹적인 작품의 상냥한 순박성과 그 섬세하고 미묘한 문체는 다행스럽게도 자연주의의 잔인성을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내 친구의 책〉(Le Livre de man Ami, 1885)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적은 첫째 권이 되었는데, 작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추억들을 더듬었음에 틀림없다(〈피에르 노지에르〉(Pierre Nozière), 〈피에르 소년〉(Le Petit Pierre), 〈꽃피는 인생〉(La Vie en Fleur)).

〈타이스〉(Thaïs, 1890)는 플로베르의 〈성 앙트와느의 유혹〉에서 착상을 얻은 소설인데,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하여, 갖가지 교리()며 철학들이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 보이는 이 소설은, 이 작가에게는 전혀 체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더 좋아하는 〈페도크 여왕의 불고기집〉(La Rôtisserie de la Reine Pédauque, 1893)이 그것을 완전히 증명했다. 이것은 즐겁고, 풍자적이고, 무신앙적인 이야기인데, 군데군데 18세기를 흉내내고 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붉은 백합〉(Le Lys Rouge, 1894)인데, 이 사랑의 이야기는 때로는 파리, 때로는 필렌체로 되어 있는 그 배경의 묘사에 의해서 특히 가치가 있다.

그러는 동안, 1893년에, 아나톨 프랑스는 〈불고기집〉의 주인공인 〈제로므 크와냐르 씨의 의견들〉(Opinions de M. Jérôme Coignard)을 모았었는데, 순수히 풍자적인 이 작품 속에서는, 인류의 모든 제도가 조리 있게 우롱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회의주의만이 현인()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태도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이성을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내던지고, 열정의 날개로 날아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까지나 이치만 따지고 있다가는, 영영 날아오르지 못하리라. '드레퓌스 사건 속에서 그는 정의에 대한 파렴치한 거부를 보았거니와, 이 사건은 그가 하나의 신조()를 선언하는 데 필요한 정열을 곧 그에게 주려 하고 있었다.

〈현대사〉(Histoire contemporaine)의 4권(〈산책장의 느릅나무〉(L'Orme de Mail, 1896), 〈버들 광주리〉(Le Mannequin d'Osier, 1897), 〈자수정 반지〉(L'Anneau d'Améthyste, 1899), 〈파리의 베르즈레 씨〉(M.Bergeret à Paris, 1901) 속에서, 그는 대학 교수이자 각성한 슬기로운 관찰자인 주인공 베르즈레 씨로 하여금, 소도시의 치사스러운 음모의 한복판을, 이어서, 비열함이 그에 못지 않은 파리를 돌아다니게 하고 있다. 그는 이제 단호히 부르즈와 사회에 반대하고, 아직 권력 행사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고 있었던 사회주의의 편에 선다. 〈크랭크비유〉(Crainquebille, 1901)는 미천한 사람들에 대한 비통한 변호이고, 〈펭귄의 섬〉(L'Ile desPingouins, 1908)은 문명의 해학스러운 서사시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아무리 풍자적인 작품을 쓰더라도, 그는 본질적으로는 예술가로 머물러 있다. 1908년에 그는 걸작인 〈잔 다르크의 생애〉(Vie de Jeanne d'Arc)를 썼다. 그는 역사가가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데 꼭 알아야만 할 것을 참을성 있게 배우고, 비평의 모든 참고 문헌과 모든 결과를 잘 조사하여, 이 놀라운 역사의 사실상의 자료를 해석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시도는 대단히 예민하고 강력했으며, 그 성과도 대단히 훌륭했다. 그는 이제까지 제시된 것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가장 사실임직한 여주인공의 심리를 제작해 낸 것이다. 그는 이 제1류의 작품 속에서 오늘날의 비평과 박학의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 소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1912년에, 그는 〈신들은 목이 마르다)(Les Dieux ont soif)를 발표했다.

이 작품 속에서 그는 대혁명의 위인들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그것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에, 이 작품은 좌익계에서 빈축을 샀다. 그는 단순히, 정당 따위는 고려치 않고, 인간에게 영웅주의와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나톨 프랑스의 근본적인 회의주의를 증명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게, 그의 스승인 볼테르 식으로, 정의감을 인정하고 있었다. 인간을 도와서 이 정의감을 끌어 내게 하고 그것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바로, 이 정의감에 반대하는 나쁜 힘을 깨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승리를 예언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로 승리를 믿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결코 잔인하지 않은 그의 아이러니의 특성은 바로 거기서 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증인과 재판관으로서 '아이러니'와 '연민'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아나톨 프랑스의 문체는 항상 명료하고, 자연스럽고, 음악적인, 찬탄할 만한 예술가의 문체요,—단지 그리스 인들과 프랑스의 고전주의자들—라블레, 라시느, 볼테르—에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예술 형식에도 친숙한 위마니스트의 세련된 교양에 의해서 길러진 문체이다. 그의 문체가 때로는 모방같이 보이기도 하고 흔히 '산들바람이 없는'1) 것은, 다시 말해서 직접 느껴진 자연의 인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런 데서 온다.

각주

  • 1)

    A. Angelier의 말.

연관목차

출처

제공처 정보

랑송불문학사 이미지

중세에서 18세기까지의 문학사를 다루고 있다.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