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JOHN CALVIN)에 의해 1559년 초안이 작성 되고 1571년 프랑스 라 로셸(LA ROCHELLE) 총회에서 정식 승인된 《프랑스 신앙고백》은 극심한 핍박 속에 있던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 HUGENOT)를 위해 작성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랑스 신앙고백 해설》을 통해 독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와 탄압에 저항해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냈던 16C 프랑스 위그노의 신앙과 신학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다.
저자 : 장대선
저자 장대선 목사는 백석대학교 신학과(신학사)를 거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에는 곧장 교회를 개척하여 장로교 교리교육 사역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다. 이는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리 체계를 충분히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 목사로서의 기본적인 소명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개척 후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등을 심도 있게 탐독하며 연구했다. 그런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 칼빈의 신학 체계를 바탕으로 이 신앙고백서를 연구하여 결실을 맺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가마산 교회(예장 대신)를 담임으로 섬기고 있는 그는 프랑스 신앙고백서 해설 외에도 교리를 간략하게 매일 공부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교재를 집필하였고(고백과문답 출판사), 최근에는 스코틀랜드 가정예배 모범을 연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다뤄지지 않은 개혁 교회의 신조들을 연구하여 현 시대의 교회에 소개하고 접목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서문_7
제1부_하나님과 그분의 계시
제1조하나님_15
제2조 계시_28
제3조 성경_39
제4조 믿음의 규칙_49
제5조 성경의 권위_58
제6조 삼위일체_68
제7조 창조, 하나님의 사역_77
제8조 하나님의 통치_86
제2부_사람과 그의 죄
제9조 인간의 타락_97
제10조 원죄_106
제11조 원죄의 영향_115
제3부_예수 그리스도
제12조_125
제13조_134
제14조 그리스도의 신성_140
제15조 그리스도의 본성의 연합과 구별_150
제4부_구원 사역
제16조 그리스도의 죽으심_163
제17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과들_170
제18조 우리의 의, 그리스도_181
제19조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_189
제20조 우리 구원의 진리_198
제21조 변치 않는 은혜인 믿음_207
제22조 믿음의 효과_215
제23조 율법의 기원_223
제24조 우리의 유일한 변호자, 그리스도_232
제5부_교회의 본질
제25조 교회에 필요한 목사_247
제26조 공적 예배의 유지_258
제27조 교회의 정의_268
제28조 교황주의에 대한 반대_278
제6부_교회의 기구(조직)
제29조 교회의 직원_291
제30조_299
제31조 교회 직원의 선출_309
제32조 교회의 법(규정)_317
제33조 파문_325
제7부_성례
제34조 성례의 시행_335
제35조 세례_345
제36조_355
제37조 주의 만찬(성찬)_363
제38조_369
제8부_세속의 권세(공권력)
제39조 관원의 권한_379
제40조 관원에 대한 복종_392
부록 : 프랑스 신앙고백 전문_404
미주_418
?
조국 프랑스를 향한 장 칼뱅의 사랑과 개혁정신이 담긴 《프랑스 신앙고백》
이 책은 16세기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들의 신앙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다
국내 최초 《프랑스 신앙고백》 해설서, 《프랑스 신앙고백》 전문 수록
프랑스 신앙고백(1559), 시대에 답하다
-시대를 진단한 진리의 역사-
스위스 제네바의 유명한 개혁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저서 「기독교강요」 초판(Christia nae religionis institutio, 1536)에는 프랑수아 1세(Fran?ois Ier, 1494-1547)에게 보내는 긴 편지 형식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그 서문을 살펴보면 칼뱅이 말년까지 조국 프랑스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서문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간절히 염원한 단적인 증거로, 1559년판 프랑스 신앙고백에서도 비슷한 서문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신앙고백은 조국을 향한 칼뱅의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신앙고백의 초안은 여전히 소수파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개신교도(위그노[Huguenot])를 위해 작성되었다. 특히 고통을 받고 있는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교황주의에 원리적으로 대처한 신앙의 골격을 변증하는 성격을 전제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프랑스 신앙고백은 칼뱅이 초안한 것을 그의 제자인 앙트완 드 샹듀(Antoine de Chandieu, 1534-1591)가 개편한 것이다. 1559년 5월 26일, 상듀는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프랑스 개혁파 교회 전국 대회에 그 신앙고백을 제출했다. 그리고 샹듀와 함께 동역한 칼뱅의 수제자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1561년에 이 고백서를 당시 프랑스 왕 샤를 9세에게 보냈으며, 그 고백서에도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문을 작성하여 첨부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0년 후인 1571년, 제7회 프랑스 개신교 전국 총회(또는 “개혁교회 총회”)가 프랑스 비스케이 만 연안에 위치한 라 로셸(La Rochelle)에서 열렸다. 그리고 그 총회에서 비로소 이 신앙고백이 정식으로 승인받게 되었다. 칼뱅이 초안한 1559년판은 35개조였으나, 1571년판은 40개조로 늘고 형식도 조금 달라졌다. 1571년 프랑스 개신교 전국 총회가 개최된 라 로셸의 이름을 따서 이 신앙고백을 “라 로셸 신앙고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신앙고백” 또는 “갈리칸(Gallican) 신앙고백”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이 보내질 당시, 프랑스 개신교도는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유럽의 국제 정세를 보면,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스페인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왕의 저항과, 상업을 기반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신흥 귀족에 대한 견제 등으로 개신교의 입지가 심하게 불안정했다. 개신교에 호의적인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 로마 가톨릭적이었다. 그러한 유럽 정세는 개신교를 동정하고 인정한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안정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장 칼뱅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성경의 참된 진리가 전파되고 장로교회를 표방하는 교회가 계속 늘면서 이 신앙고백이 정식으로 승인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앙고백이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기간은 지극히 짧았다.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이 신앙고백의 승인은 그만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1571년 라 로셸에서 개최된 프랑스 개신교 전국 총회에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 후아나 3세(잔 달브레)와 그녀의 어린 아들 앙리 4세, 어린 왕자 콩테,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1519-1572) 등 여러 지도자가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나바라의 왕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 결혼식에는 위그노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콜리니도 참석하였다.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날인 8월 24일에 이들을 학살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이 날부터 7일 동안 루브르궁과 오를레앙, 트로이, 루앙, 리옹, 툴루즈, 보르도 등지에서 수많은 위그노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위그노와의 전쟁이 발발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장 칼뱅, 데오도르 베자와 같은 걸출한 종교개혁 인물을 배출했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겪는 동안 결국 표면적으로는 종교개혁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프랑스 신앙고백의 배경과 역사는 1647년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승인되는 과정이나, 그후 역사와도 상당히 비슷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도 콜리니처럼 정치적·군사적 수완을 발휘한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상당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승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신앙고백이 승인된 후에는 곧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지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신앙고백을 수용하여 공식적인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곳은 스코틀랜드였다.
이러한 신앙고백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일을 사탄이 매우 극렬하게 방해한다는 사실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신앙고백은 실패하거나 폐기되지 않고, 오히려 주변으로 퍼져나가 스위스와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에 참된 진리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신앙고백을 통해 진리를 확고히 수립한 지역에서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 속에 사용되어 사탄도 도저히 방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리의 진수를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프랑스 신앙고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프랑스 신앙고백의 역사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신앙고백들이 참으로 치열하고 시급한 위기에 빠진 진리의 신앙인들에게 즉각적이고 분명한 답변과 확신 있는 고백을 선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에 보수적 신앙을 표방한 많은 교단(특히 장로교단)과 목회자들은 시대의 아픔과 불의에 대해 애써 “정교분리”라는 변명을 앞세워 침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신앙고백이 승인된 역사에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당면한 시대의 아픔과 불의에 진리로 항거하였다. 우리는 피켓과 행진처럼 진보적인 취지로 불의에 저항하기보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확고하게 붙잡아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 실제로 프랑스 신앙고백을 기초한 장 칼뱅과, 프랑스 신앙고백이 승인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베자는 진리를 선언하고 확고하게 붙잡는 방법으로 당시의 불의와 아픔에 저항했다.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 기록한 헌사, 그리고 1561년 당시 프랑스 왕인 샤를 9세에게 프랑스 신앙고백을 보내면서 서문에 기록한 헌사는 바로 그처럼 진리로 항거한 생생한 역사인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많은 불의와 시대적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진리를 대적하며 거스르는 수많은 박해와 핍박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분명하게 저항하는 항거자(Protestant)여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저항은 이미 우리 손에 있는 신앙고백들에 담긴 진리를 확고히 하고 분명하게 천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