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UNGEUN)

프랑스 철학 [French philosophy]

한신학 han theology 2018. 6. 21. 08:14

프랑스 철학

[French philosophy]

프랑스 철학이 참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으로 굳어지는 것은 뭐니 해도 데카르트 이후의 일이지만 우선 그것으로 굳어지는 프랑스 철학이 성립하는 거대한 전제, 혹은 배경으로서 고찰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프랑스 정신, 혹은 프랑스 사상은 보통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물론 그대로의 계승은 아니지만) 중세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파리 신학대학, 즉 소르본느는 13세기 이래 기독교 (가톨릭)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극히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와 호응하여 '스콜라 철학'이 프랑스 지방에서 가장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질송이 지적한 대로 데카르트 철학은 비판적 또는 부정적 계승이라 해도 좋지만 '스콜라 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신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인간적, 기계론적 '합리주의'의 부정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그곳에는 있다.

하지만 이 전환은 물론 간단하게 행해진 것은 아니며 특히 거기에는 라블레나 몽테뉴에 의해 대표되는 인간주의=자연주의의 사상(그것도 모랄리스트 풍의, 즉 습속의 관찰자 풍의 사상)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으며 안 되었다. 라블레의 작품을 관철하는 주제는 '인간의 해방'이란 것으로 인간으로서의 본성(=자연)을 서서히 자유롭게 개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몽테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의 건강한 인식태도를 '내가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말로 표현하고 행복을 나약성과 정당한 욕망을 가진 현실의 구체적인 개인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하였다.

라블레와 몽테뉴가 지혜와 윤리의 측면에서 중세사상의 속박을 단절시켰다 해도, 근대사상(특히 인식과 과학의 측면에서의)의 프랑스에서의 발전은 17세기의 철학자들, 특히 데카르트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원리 위에 학문을 전 영역에 걸쳐서 통일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수단을 엄밀하고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서 찾고 형이상학, 자연학, 의학, 역학, 윤리학 등 모든 것을 포함한 모든 체계를 '보편수학'으로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확실하게 '명증적'()인 인식의 기초를 찾아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얻어진 확실한 것이 '사유'(cogito)의 직관이며 존재였다. 이 'cogito'의 직관은 데카르트의 제1원리를 이루는데, 동시에 르네상스 이래 점차 자기의 존재와 독립성을 주장해 온 '인간적 자아'는 여기에서 그의 자립적인 존재원리를 발견하기에 이르고, 한편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관에 있어서도 '물활론적인 자연관'으로부터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의 결정적인 전환을 가능케 하였다.

그런데 데카르트 철학의 성립과 그 의의에 대하여 잠시 서술한 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력의 범위는 17세기는 물론이고 18세기에 나아가서는 현대에까지 특히 프랑스 철학에 있어서는 뒤에 언급하는 것처럼 사르트르나 많은 현상학파에까지 널리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영향 하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 어떤 의미에서는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서, 전근대()와 초근대()가 뒤섞인 형태로 인간적 공동체의 상실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부터 '무용하며 불확실한 데카르트'라고 예리한 비판을 가한 사람으로서 파스칼이 있으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상상력'론에 있어서도 전개를 보인 사람으로서 말브랑슈가 있다.

그런데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이 엄밀한 기하학에서 계시 받아 명제를 연역적으로 서술하고, 또한 여러 위대한 형이상학 체계를 성립시킨 것에 대하여 그리고 데카르트 철학이 크게 공헌한 자연학의 발전과 비판적 정신의 고양이 17세기적 사상 그 자체의 틀을 파괴하는 역할도 함으로써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은 영국 사상, 특히 로크뉴턴의 영향을 받으면서 '경험적 이성'의 입장으로부터 확립된 부르봉 절대왕정 하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정면으로부터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전자는 대체적으로 개인사색적이었던 데 대하여 후자는 명확히 사회적 관심이 풍부하고 표현 형태에 있어서도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팸플릿, 백과전서 등의 형태가 유행하였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은 크게 나누면 전기 '계몽사상', 후기 '계몽사상'=백과전서파루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전기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은 몽테스키외볼테르인데 전자는 정치적 모랄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관점으로부터 정치체제의 분석과 해명에 공헌하여 '삼권분립'의 이론을 제출하고, 후자는 위대한 팸플릿텔(시사논평)의 재능을 낳아 시대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기 '계몽사상'이 신에 대해서는 '이신론'의 입장을 취하고 정치와 도덕의 기초를 인간의 자연 본성에서 찾은 데 반해서, 그것을 물질적, 육체적, 본능적 자연으로 기초 지우려 한 사람이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백과전서'파이다. '백과전서' 운동은 달랑베르를 공동편집자로 돌바하, 엘베시우스, 튀르고, 콩디약, 콩도르세 등, 실로 180여 명의 협력을 얻어 프랑스 혁명을 준비한 18세기의 철학적, 과학적 집대성을 실현하였다. 하지만 디드로는 그런 강력한 지도자나 조직가일 뿐 아니라 후기 '계몽사상'중 가장 주목할 만한 철학자이며, 단지 '이신론'()으로부터 '유물론'으로 이행했다는 것 이외에도 풍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유로이 이성을 구가하고 과학의 만능성에 기대에 부풀어 18세기 한복판에서 인간의 내적 현실, 내적 '자연'의 복권을 높이 제창한 사람이 루소인데. 그는 '자연감정' 속에서 내면적 인간을 발굴함과 동시에 거기로부터 독특한 사회이론(새로운 '사회계약론')을 전개하여 공화제를 지향하고, 이는 프랑스 혁명, 특히 자코뱅 당의 지도이론이 된다. 또한 이어서 루소에 대해서는 레비 스트로스에 의해서 '인류학의 선구자'라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루소 자신은 18세기 인간이면서 이미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상의 선구를 이루고 있지만, 루소와는 달리 18세기 프랑스 감각론의 대표자인 콩디약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면서 외감()으로부터 '내감'()의 사실을 독립시켜 독자적인 '내감의 철학'을 펼침으로써 18세기로부터 19세기로의 다리 역할을 한 메느 드 비랑의 존재도 빠뜨릴 수 없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서는 한편으로 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등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의 정치학자가 있고 한편으로는 르낭, 테느, 르누비에, 라베송 등 실증주의와 형이상학의 사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철학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중에서 언급하자면 무엇보다 오귀스트 콩트와 앙리 베르그송일 것이다. 콩트는 보통 '사회학의 창시자'로서만 취급되지만, 프랑스에 있어서 그때까지의 학문, 사상의 위대한 집대성자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프랑스에 있어서는 데카르트나 루소와 함께 끊임없이 언급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개화한 베르그송 철학은 그에 앞선 수십 년의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아류 콩트주의나 법률주의적인 칸트주의에 의한 지배 후에 널리 자유로운 지적 대중 으로부터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래서 그것은 '순수 지속'의 직관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계' 그 자체를 '생의 약동'(elan vital)에 의한 '창조적 진화'의 위상에서 취급되고 또한 그 견지에 서서 있어야 할 사회, 있어야 할 종교를 '열려진 사회' '열려진 종교'로서 포착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이상학'에 의해서 과학적 심리학을 재출발시키고 새로운 과학비판을 고취하는 한편 문학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를 미쳤다. 베르그송의 동시대인 철학자로서는 브론델, 브랑슈비크, 아마랑 등이 유명한데, 그들보다도 더욱 주목해야 할 사람은 그들보다 약간 늦은 신토마스주의자 미리탱과 '프로포'(어록)란 형식을 주고 사용하여 '의지적인 카르테지아니즘'을 체현했던 현대의 소크라테스라고도 할 수 있는 알랭(E.A. Chartier)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나타난 사람이 이미 2차 대전 전과 전쟁 중에 활동을 시작하고 전후 한층 활발한 활동과 영향을 미쳤으며 후설현상학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독일의 하이데거와는 다른, 보다 구체적이고 사회에 대하여 열려진 형태로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전개한 사르트르메를로 퐁티가 있으며 또한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의 계보에 속하는 유신론적(기독교적) '실존주의' 자인 마르셀이 있다.

특히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제2차 대전 후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에 걸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는 어느 쪽이나 현상학으로부터 가장 많이 배워 온 뛰어난 체계적 이론가임과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도 접근하였지만, 한 발 앞서 정치적 관심을 강하게 가진 메를로 퐁티가 이윽고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그 자체를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사용한 데 대하여, 사르트르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었다.

또한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 철학자로서는 정통파적인 가로디 외에, 실존주의로부터 출발하여 다채로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르페브르, 거기에다 루카치 이론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 골드만 등이 이름난 존재이며 더욱이 최근에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취급되고 있는 알튀세가 주목받고 있다.

'구조주의'란 제2차 대전 후 사르트르를 대표자로 하여, 소위 철저한 발전을 이룬 '현상학적 방법'의 성과에다, 그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전개되어 온, 일종의 엄밀성을 지향하는 객관주의적, 개념주의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학자이면서도 철학자의 자격도 충분히 갖춘 레비 스트로스가 언어 체계에 있어서 음운의 체계를 모델로 널리 문화나 인간적 사상()에 있어서 '시스템'이나 '구조'의 지배와 중요성에 착안한 것에서 유래하는데, 심층심리학에서는 라칸, 마르크스주의의 '과학화'의 방향에서는 앞의 알튀세, 거기에다 '시스템'의 지배, '구조'의 지배라는 각도로부터 인간 '광기'의 재평가나 근대사상에 있어서 '말'과 '사물'의 관계를 고찰한 푸코가 '구조주의'의 4대 거장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 밖에 현대 프랑스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철학자로서는 '물질적 상상력'을 설파한 바슐라르, 프랑스에서는 드문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철학자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해석학자' 리클, 게다가 젊은 영재로 언어론, 표현론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데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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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전은『세계철학사』독자들을 위한 사전으로 이 땅에서 자연과 사회 및 인간 사유의 일반적 발전 법칙을 탐구하여 올바른 세계관을 수립하고 인식과 실천의 과학적 방법을 연구 ․ 개발하는 데...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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