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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추천]수운과 화이트헤드

한신학 han theology 2018. 5. 19. 21:31


BOOKS

제 482호 2001.6.6




수운과 화이트헤드
그리고 ‘딴따라’ 조영남


조우석의 책읽기 세상보기





홍콩의 아큐는 아침에 일어나 나이키 신발로 한바탕 조깅을 한 뒤 콜게이트 치약과 질레트 면도기로 세수를 한다. 헤이즐넛 커피를 마신 뒤 모토롤라 휴대폰을 들고 출근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MS사 윈도우가 장착된 IBM 컴퓨터다. 엘리트층인 그의 집 주말은 美 NBA 프로농구를 보고 싶어하는 아들녀석과 할리우드 영화를 보려는 아내 사이에 채널 쟁탈전이 벌어진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의 멋진 글 ‘문화영역의 세계화, 또는 아큐현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80년 전 루쉰(魯迅)의 소설 ‘阿Q정전’에 나오는 불쌍한 아큐야 외세에 실컷 얻어맞고서도 ‘나는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믿는 앵벌이형이었지만, 홍콩은 물론 요즘의 서울 등에 등장한 아큐들은 또다른 모습이다. 정리하자면 둘 중 하나다. 자신은 어쨌거나 순수하다고 믿는 토종형이거나, 아니면 자신은 문화적 잡종인데 그것이 요즘 세상의 대세라고 믿는 확신범의 모습으로…. 했더니만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영국적 가치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곤혹스런 질문이 나올 정도로 런던 등지에서 ‘중심부형 아큐’까지 출몰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주 ‘조우석의 책읽기 세상보기’는 이런 아큐들의 세상을 정면돌파하는 책이요, 주제다. 지구촌의 주변부와 중심부에서 퓨전형 아큐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이 시대 환경을 거슬러 올라가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한신大 김상일 교수의 묵직한 철학서 ‘수운과 화이트헤드’가 그것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세상에 이 책을 들고 나온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문화와 삶의 영역이 그러하듯 먹거리에서도 유전자 조작 식품이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 역설적으로 생물학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이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내달려온 근현대 1백년 동안 시렁위에 올려둔 채 내쳐 잊어왔던 ‘한국문화의 토종 씨앗’ 하나를 소중하게 들여다 보는 마음으로 이 책을 들여다 보자. 뜻밖에도 신학서 ‘예수의 샅바를 잡다’를 펴냈던 대중가수 조영남의 화답이 있어 이번의 논의가 풍요롭기도 하다(박스기사 참조).

신간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과연 무엇이 한국인의 마음자리 가장 밑바닥에 문화코드로 놓여 있는가를 물으면서 내처 신학의 정점인 신관(神觀)까지를 거론한다. 질겁할 일 만은 아니다. 여기서 신이란 예배대상이 아니다. 문화코드이자, 해당 문화권역의 상징에 불과하니까. 구체적으로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책 제목처럼 동학(東學)의 지도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를 서양의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1861∼1942)와 맞대면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면 화이트헤드는 누구인가? 니체가 그러했듯 서구 지성사에 ‘망치를 든 철학자’였고, 강력한 화전민이 바로 그였다.

니체가 시효만기된 흘러간 옛노래 내지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이 돼버렸다고 판단한 서구 형이상학이라는 집을 부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 거대한 집의 상징인 인격신에 대해 감히 ‘죽었다’며 과격한 사망선고를 내렸다면, 화이트헤드는 망가져버린 집 공간에 새 문법과 새 논리를 제공하려 한 사람이다. 핵심은 이렇다. 주체와 객체 사이를 칼로 두부 자르듯 구분해온 이분법, 어떤 실체(있음,有)라고 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딱딱하게 굳어진 실체 대신 포괄적인 ‘되어감’(becoming) 내지 ‘과정’(process)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 불교 냄새 내지 도가의 분위기가 솔솔 나지 않는가?

그러면 수운이 비집고 들어갈 대목은 어디인가? 저자가 볼 때 니체가 망치질을 했던 인격신- 물론 현실종교 속에서는 아직도 기능을 한다-을 대신할 보다 신축자재한 새로운 보자기, 즉 바로 그런 신관을 제시한 것이 수운이다. 즉 굳이 신을 죽이지 않고서도 그것에 비인격적 창조성이라는 새 소프트웨어를 집어넣는데 성공한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동경대전’에 나타난 수운과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절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폴 틸리히와 하이데거 등 20세기 서양사상가들이 모두 해내려던 철학적 과제가 바로 인격신과 비인격적 존재자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화이트헤드와 수운만큼 그 작업에 성공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머리말 4쪽)
다소 어려운가? 그럴 것도 없다. 이 신간은 왜 최근 몇십년간 서구의 교회들이 신자는 점차 줄어들어 속빈강정이 돼가면서 외려 티베트불교, 선불교를 포함한 非서구의 것에 매달리는지에 대한 한국의 응답이다. 뒤짚어 말하면, 이 신간은 한국의 주류 종교 기독교가 겉으로는 세계 최강 교세를 자랑하는 것과 달리 내부적으로 단단히 든 속병을 어떻게 치유할까에 대한 포괄적인 치유방안 제시다. 아니 ‘무늬만 퓨전’이 아닌 동·서양간 진정한 만남을 위한 멍석깔기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울 아큐들의 알고보면 그리 편치만은 않은 속마음을 되짚어보는 성찰의 텍스트로 각별하게 기억돼야 한다.

또 하나, 이 책은 우리 근현대 인문학에서 혁신이고 자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자기의 모습, 자기의 고민을 푸는 작업을 바다 건너 서구의 언어와 텍스트에서 구해온 오랜 자기망각의 흐름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엄청나게 풍부한 사유와 실험의 바다였던 민족종교를 포함한 구한말의 움직임을 ‘현재의 우리 고민’으로 깊숙하게 끌어들이는 작업 말이다. 따라서 그동안 직무유기를 해왔던 국내의 강단학문은 이 책을 눈을 씻고 봐야 옳다. 비교철학을 떠나 입체적인 제3의 사유를 창출해낸 가능성도 높이 평가돼야 옳다.
(중앙일보 문화부 출판팀장·for NWK)


“순 국산 민족종교가 불쌍해 돌아서지 못한다”

“이 책을 통해 보세가공품 아닌 순수 국산품인 동학(東學)에 대한 매력을 느껴보길 바란다.” ‘수운과 화이트헤드’의 머리말을 보면서 내심 나는 놀랐다. 그 말은 본디 대중가수 조영남이 구사했던 수사(修辭)이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조씨가 지난해 말 펴낸 신학서 ‘예수의 샅바를 잡다’에서 조심스레 내비쳤던 이 말이 학계에 영향을 주고 그 이후 철학·신학서의 의미있는 메아리로까지 돌아온 것이다. 다음은 조영남의 말이다.
“나도 내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처럼 예수만 믿을 것이냐. 그건 아니다. 김권사님은 예수라는 보세가공품으로 충분히 행복했지만, 나는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도 좋고, 후미진 곳에 틀어박혀 있는 최제우·나철·전봉준 같은 국산품이 못내 불쌍해서 돌아서지 못한다.”(3백28쪽)

팝음악 ‘딜라일라’를 부른 가수이자, 미국에서 안수받은 정식목사이기도 한 조씨의 이 발언은 근현대 1백년 만에 한국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가장 토종적 고해성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단했던 현대사의 와중에서 가슴 깊이 묻혀 있던 자기고백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본다. 농협의 TV-CF에서나 쓰였던 ‘신토불이’라는 방어적 쇼비니즘의 유행어와 또 달리 한국인의 무의식을 척 하니 짚어내는 놀라운 발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아큐들의 세상, 문화적 잡종의 세상에서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지구촌 권역별의 문화적 씨앗은 유지돼야 옳다. 특히 한국은 동서문화의 교차로로 동북아의 심장부에 있지 않은가? 또 간수돼야 할 한국의 문화적 씨앗 중에 최제우·나철·전봉준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발언을 쇼비니즘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그는 진짜 구제 못할 아큐에 불과할 것이다.





제 482호




 

출처 : 동양철학과 수행
글쓴이 : 이스찌나 원글보기
메모 : 수운과 화이트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