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7. 18:44 |
레오니드 일리치 브레즈네프 (Leonid Il'ich Brezhnev)
1907년 1월 1일 생 - 1982년 11월 10일 사망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우크라이나의 카멘스크(현재의 드네플젤친스크 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일리야는
조부의 대를 이어 금속세공업에 종사한 우크라이나 거주의 러시아인이었다. 1921년에 가족과 함께 크르스크로 이사한 그는
15세에 철공소에서 일하다가 1923년에 공산당 청년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했다.
볼세비키는 콤소몰의 젊은 노동자를 대학으로 진학시켜 전문가로 양성할 계획을 세웠기에 브레즈네프도 이에 의해
60년대 소련지도자의 전형적인 인물로 자라났다. 러시아 혁명 후 많은 노동계급 청년들처럼 브레즈네프도 1924년부터 1927년까지
크르스크의 직업기술학교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초급 농업기사로 토지개량 사업에 종사했다.
1930년에 카멘스크로 돌아와 다음해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브레즈네프는 드네플젤친스크 공업대학에서 철공학을 공부해
1935년에 졸업 후 동 우크라이나 제철소의 기사로 임명되었다. 1935년에 적군(赤軍)의 육군에 입대한 그는 전차훈련학교에서 훈련 후
전차부대의 정치요원이 되었다.
1936년 말에는 드네플젤친스크 공업대학의 교장이 된 브레즈네프는 1937년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당 제 1 서기,
1939년엔 드네플젤친스크 주 당 서기가 되어 방위산업 조직에서 일했다. 브레즈네프는 러시아 혁명 이전에 성인이 아니었던
소련공산당의 첫 세대였기에 1924년의 레닌 사후 공산당의 주도권 싸움에 그는 참가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가 입당시 스탈린은 절대적인 지도자였기에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젊은 공산당원은 완전한 스탈린주의자로 성장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해간 이들 젊은이들은 공산당 및 지방의 중요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41년 6월에 독일군이 발바롯사 작전을
발령하여 소련으로 침공해왔다. 드네플젤친스크 시는 8월 26일에 독일군에게 함락되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시의 사수에 노력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브레즈네프는 군의 정치요원으로 일했다. 적군에선 전문사관과 정치요원에 의한 2중 시스템으로
부대를 운용했는데 이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직업군인에게 있어선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10월에 브레즈네프는
여단인민위원의 계급으로 남부방면군 정치지도부 차장으로 취임했다.
1942년에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독일군에게 넘어가자 브레즈네프는 자카프카즈 정면의 정치지도부 차장으로서 카프카즈에
급파되었다. 1943년 4월에 제 18군의 정치부장으로 임명된 브레즈네프는 연말에 적군이 주도권을 회복하여 제 18군이
제 1 우크라이나 정면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서쪽으로 진격하자 상급정치위원으로 종군했다.
그의 후원자는 니키타 흐루시초프였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브레즈네프는 제 4 우크라이나 방면군 정치지도부 부장으로
프라하에 입성했다. 1946년 8월에 브레즈네프는 소장 계급으로 적군에서 물러났다. 그는 군 사령관이 아닌 정치요원으로서
대조국 전쟁에 종군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위원으로 재건계획을 실시한 후 브레즈네프는 도네플페트로프스크 주의 제 1 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 그는 소련최고회의 대표의원이 되어 연말에 몰도바 공산당 제 1 서기로 취임했다. 1952년엔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최고간부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드네플페트로프스크 및 몰도바, 카자흐스탄 등의 부임지에서 갈고 닦은 인맥을 바탕으로 후에 권력강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느데플페트로프스크 마피아>, <몰도바 마피아>라 칭한 여러 인물들 중에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딤 무하마드 쿠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당시 적군의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브레즈네프(오른쪽)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자 최고회의 간부회가 폐지되면서 이보다 작은 정치국으로 재편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임원이 되진 못했지만 그 대신에 중장 계급과 소련군 정치총국장 제 1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의 후원자였던 흐루시초프의 배려이기도 했다.
1954년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산당 제 2서기, 1955년에 제 1서기로 임명된 브레즈네프는 카자흐스탄의
간척사업을 주도했다. 1956년 2월에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상경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원 후보 겸 총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재건계획의 임무를 담당했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측근이기도 해서 1957년 6월엔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스탈린의 옛 동지들인 게오르기 주코프,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잘리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시초프와 패권다툼을 벌일 때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스탈린의 옛 지지자들이
물러나자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정식임원이 되었다.
1959년에 브레즈네프는 소련최고회의 간부부의장이 되어 1960년 5월엔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명목상 국가원수급이었다.
실권은 당 제 1서기인 흐루시초프에게 있었지만 의장의 직권은 외국여행도 자유로워 브레즈네프는 서방의 의류 및 자동차에
큰 흥미를 가졌는데 이것은 후에 그에 대한 악평이 되기도 했다.
1962년까지 흐루시초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평온했다. 그러나 그의 노쇠와 더불어 지도력이 저하하고 신경질적이며
안하무인적인 태도는 지도부의 신뢰를 잃어 자리가 위태롭게 되었다. 더우기 농업과 경제정책의 실패는 흐루시초프의 지도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의 충복이었지만 니콜라이 이그나토프 및 알렉산드르 쉘렌빈과 유대하여 1963년엔
흐루시초프의 추방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1964년 10월 13일 및 14일에 열린 임기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연금생활에 처해져 퇴진해 브레즈네프는 자동적으로 당 제 1서기가 되었고 알렉세이 코스이긴은 수상이 되었다.
흐루시초프와 친했던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소련최고회의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신분을 유지했지만 1965년에 실각하여
니콜라이 포드고르누이가 그 자리에 취임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 산하시절에는 스탈린식 정치를 비판하고 대숙청에 의한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소련의 지적, 문화적 정책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면서 흐루시초프가 실시했던 이 정책들은 역행하기 시작했다. 대조국전쟁 승전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1965년 5월 연설에서 브레즈네프는 처음으로 스탈린을 언급했다. 1966년 4월에 그는 제 1서기란 명칭을 스탈린 시절의 서기장으로
변경했다. 1966년에 작가인 유리 다니엘 및 안드레이 시냐프스키의 억압은 구시대로의 억압적 통제정치로 회귀했다.
유리 안드로포프가 지휘한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브레즈네프의 통제정책을 바탕으로 흐루시초프 시절 약해졌던
권력의 힘을 다시 회복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1968년에 첫 위기를 맞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서기장이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의
개혁은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화 및 인권개혁으로 발전했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공산당 체제를 흔들었기에 다른 소련의 위성국가들도 이에 동조하는 경향이 벌어졌다.
이를 거슬리게 여긴 브레즈네프는 7월에 두브체크를 <수정주의자>라 비판하면서 8월 20일에 소련군이 위주가 된 바르샤바 조약군을
투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해산시켜 프라하의 봄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위성국가들의 국내문제에 간섭하여 흐루시초프가 1956년에 헝가리에서
발표한 소련의 기존 정책을 더욱 강화해 주권제한론,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 불리웠는데 이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시절의 고루한 인물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기도 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회담중인 브레즈네프.
미소관계는 핵확산 방지조약의 체결로 큰 충돌은 없었는데, 존슨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방문하려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유혈진압 사태를 보고는 이에 항의하여 소련방문을 취소했다. 하지만 미국 및 NATO 각국들은 입으로만 비판했을 뿐
구체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의 소련 세력권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음을 의미했다.
같은 일당독재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1960년대 초반부터 소련과 대립을 계속했다. 1964년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관계는 개선되지 못했다. 1969년엔 우수리 강의 다만스키 섬(중국명칭 진뱌오 섬)을 둘러싸고
양국의 군대가 무력충돌하여 중소국경분쟁이 벌어졌는데 브레즈네프는 베트남전쟁에선 반중계열인 북베트남에 지원해
양국관계는 더욱 앙금이 남았다.
1971년에 시작된 중국과 미국의 관게개선은 국제관계에 새로운 과정으로 다가왔다. 소련에 대한 중미동맹의 구축을 막기위해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협상하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972년 5월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브레즈네프와 만나
전략병기 제한조약(SALT 1)에 조인하여 긴장완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1973년 1월의 파리 평화협정에선 베트남전쟁의 공식적인 종료와 함께 미소관계의 장애물이 제거되자 브레즈네프는 5월에
서독을 방문하고 6월엔 미국을 공식방문했다. 데탕트의 시기에 브레즈네프는 1975년 7월, 헬싱키에서 전유럽 안전보장 협력회의
(CSCE)에서 얄타 체제를 인정하여 유럽국가들의 사상 및 종교, 인권 및 기본적 자유를 존중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같은 브레즈네프의 발언은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 미국에서는 브레즈네프의 이러한 술책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뒷통수치기 수법이라 평가절하하면서 소련의 위성국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던 지유화 운동의 탄압과 유대인의
강제이주 문제를 들어 소련을 비판했다. 1974년 11월에 브레즈네프와 포드 대통령은 유대인 강제이주 문제를 논의했지만
브레즈네프는 국내문제의 간섭을 이유로 이를 거절해 미국은 그의 이중적인 행동을 다시 비난했다.
1970년대 소련은 대미관계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여러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은 중동 및 아프리카에 정치적인
힘과 외교력을 확대하여 쿠바를 대리로 해 1975년의 앙골라 내전, 1977년~1978년의 에티오피아 - 소말리아 전쟁의 군사개입에
성공했다. 그러면서 브레즈네프는 국내에서의 지위를 강화해 1977년 6월에 포드고르누이를 강제로 은퇴시킨 후 소련최고회의
간부의장직 및 당 서기장을 통합하여 소련연방 최고간부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코스이긴은 1980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수상이었지만 이는 명목상이었으며, 브레즈네프는 1977년부터 독재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1976년 5월에 브레즈네프는 스스로를 소련원수로 임명했다. 이것은 스탈린 시대 이후 정치적인 원수의 등장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실전경험이 없었고 직업적인 군인이 아니었기에 그의 원수취임은 군 내부의 불만도 많았다. 하지만 브레즈네프의 절대권력 앞에
이러한 불만은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전략무기 억제협정에 서명중인 브레즈네프.
1970년 중반부터 브레즈네프의 절대권력은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체된 소련의 경제구조 탓이었는데
여기엔 두 가지 심각한 원인이 있었다. 첫번째 원인은 소련경제가 스탈린식 공업정책을 벗어나지 못한 후진적인 구조여서
농업에 의존했다는 점이었다.
스탈린식 농업생산화는 대규모의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사유재산 불허라는 공산주의적 유물론에 의해
집단농장화로 소출이 매우 낮아 부족한 식량으로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문제는 매우 시급했었다. 그리고 이에 의해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개선되지 못했기에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었다.
두 번째 원인은 브레즈네프의 집권 후 소련의 정책들이 1930년대 시절의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로 회귀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도입 및 근대화가 추진되지 못한 것이었다. 소련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중공업의 육성에 힘을 쓰며 미국과의
냉전체제에 따른 군사력 증강만을 목표로 했기에 인민들의 기본적인 경공업 생산품목은 뒷전으로 밀려나 소비재는 생산되지 못했다.
군사력 및 우주개발의 계획에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 인민들의 개인생활 및 사회의 발전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기에
주택의 노후화와 병원, 학교시설 및 교육제도의 낙후화는 인민들의 생활의식을 침체시켜 소련의 경제는 비경제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브레즈네프와 측근들은 오직과 탈세로 서구에서 고급자동차 및 물품을 수입하여 더욱 지지를 잃었다.
브레즈네프의 지배는 1976년 12월 70세의 생일때 정점에 달했다. 스탈린의 지배와 달리 브레즈네프의 지배는 인민들의
존경 및 경외감이 없었다. 브레즈네프는 1979년 6월에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협정에 조인했지만 국내문제엔
무관심하여 당시 농업담당장관이던 고르바초프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간언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1979년 12월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지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는데 사실 아프가니스탄의
군사개입은 정치국의 정식결정이 아닌 브레즈네프 측근들에 의한 비공식적 결정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개입은
서방국가들과의 평화무드를 깨어버렸기에 미국은 소련으로의 곡물수출을 금지시켜 소련의 경제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미국은 카터 정권하에서 재군비 프로젝트를 개시해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의해 소련경제는 막대한 부담을 안아 이는 나중 소련의 붕괴라는 결말을 가져왔다.
1982년 3월에 브레즈네프는 심장발작으로 입원했다가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브레즈네프의 유해는 붉은 광장의 크레믈린 벽에 매장되었다. 브레즈네프의 후임으로는 KGB 국장을 지냈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그 뒤를 이었다.
출처 : 에드윈 베이컨 <브레즈네프의 일생>, 사진은 상업적 사용이 제한된 공개용.
[출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작성자 도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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