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석박사과정]

교련학

한신학 han theology 2017. 3. 22. 22:22
1. 개요2. 도입 배경3. 남자고등학교 교련
3.1. 교과 내용3.2. 교련복 및 장구3.3. 교육용 소총
3.3.1. 실총3.3.2. 목총
3.4. 교련 교사3.5. 수업 분위기3.6. 비판
3.6.1. 병영 국가화와 정권안보교육3.6.2. 교련 교사의 자질3.6.3. 교과 내용과 수업의 부적절성3.6.4. 군사적 가치 없음
4. 여자고등학교 교련5. 대학교 교련
5.1. 문무대 훈련5.2. 전방입소훈련5.3. 복무단축 혜택5.4. 전방입소 거부투쟁
6. 폐지7. 외국의 교련

1. 개요[편집]

1.21 사태을 거치면서 학생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과목이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 징발 및 훈련이 교련 과목의 모체에 해당되며 전후에도 유사시에 고등학생들이 병력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목이다. 때문에 교련 교사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전현직 위관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1989년부터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서서히 폐지수순을 밟으면서 1994년부터 구급법으로 대체되고 이후 선택과목으로 변하다 2007년까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재학중인 일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관련 교육 훈련 과목이다.

2. 도입 배경[편집]

교련교육의 모체는 1949년 자유당 정권이 학원통제와 학생 동원을 위해 만든 학도호국단이었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다.[1][2]

그러던 것이, 1968년 수도 서울에 대규모 무장공비가 출현해 군경과 대대적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 즉 1.21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당장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극도로 긴장된 정세[3]속에, 현역병들은 군생활이 자동으로 최대 6개월 연장되었고.... 안습이 아니라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4],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1969년부터 고교 필수 과목[5][6]으로 부활한다. 이상하게 교련세대에게 김신조가 폭행당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리고 1975년에는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였다.

3. 남자고등학교 교련[편집]

3.1. 교과 내용[편집]

과거 고등학교에서 1주일에 2시간의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국방부가 제작한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 주 내용으로.... 추가 바람 그리고 세대에 따라서 제식훈련(여자용 교과서에서는 질서훈련이란 단어를 사용)도 했다. 집총은 아닌 맨손에 한해 실시. 대체로 남자고등학교와의 차이점이라는 건 총검술이 없고 그 대신 구급법이 좀더 전문화되어있다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한마디로 이런 모습

파일:attachment/556225114174844.jpg

파일:attachment/16540005.jpg

남학생의 교련실습 [8]

여학생 교련실습 장면


대체로 실습과 이론으로 되어 있었는데, 남고의 경우에는, 예비역 중위에서 소령 출신[9] 중 해당 과목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교사로 배정되었다. 교과서에는 이런 실습 내용의 설명과 함께 M-1 소총 사격 및 분해법이나 화생방전의 대처방법, 그리고 주요 전사(戰史)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는 포로가 되었을 때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방법까지 실려 있었을 정도. 여름에 뙤약볕 아래에서 목총들고 학교 운동장을 박박 기다보면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향하게 되었다

3.2. 교련복 및 장구[편집]

파일:kyor.jpg

  • 대중적으로 흔히들 알려 진 무늬는 이러한 흑백 한글 무늬(소위 얼룩말 무늬)지만, 위의 여학생 실습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멀쩡하게 생긴, 즉 현용 군복으로 써도 될 만한 위장무늬를 가진 교련복도 있었다. 눈으로 보기엔 같은 얼룩말 무늬라고 해도 학교나 교복 메이커에 따라서 패턴이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다. 새마을운동 표식이나, 책 혹은 낙하산이 그려진 검은 점 무늬와 "선진조국창조"북한?? 라는 한글 등등.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검은 점 무늬에서 김일성 만세가 발견되어 폐기처분 되기도.

  • 학년별로 카라부분에 계급장 표식을 달며, 총학생회장, 및 각 학급 반장, 부반장 등은 편제에 따라 보직이 있었으며, 이를 명찰 부분에 오바로크로 박는 경우도 있었다. 부대마크처럼 학교 교표를 어깨에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 학교마다 다른 무늬 때문에, 타학교 전학생들인 교련복을 새로 구입해야 하는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학교 앞 문방구의 매출을 걱정해 주시는 자상한 선생님

  • 부속 장구로 요대, 각반, 교련모[11], 앞가리개 등이었다. 일제시대처럼 붕대각반을 쓴 것이 아니라, 학교 앞 문구점이나 동네 가게에서 미군이 2차대전 초기에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군화끈으로 묶어주거나 쇠 클립으로 고정하고 끈매는 천으로 된 각반을 팔았다.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엉덩이에서 불이 났다. 간혹가다 각반 대신에 워커를 신고 오면 봐주는 학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이나 삼촌의 예비군 워커를 빌려 신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봉와직염에 걸리게 되었다 카더라


3.3. 교육용 소총[편집]

http://image.kobay.co.kr/common_filesystem/web_auction/itemImages/13/06/WF/1306WFC8IP7_1.jpg
교련용 M16 목총, 사진은 합성수지로 만든 후기형.

3.3.1. 실총[편집]

1980 년대 후반까지도, 총기 분해 실습을 위해서는 공이가 제거된 M1 개런드 실총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학교 마다 무기고가 있었다. 
총검술에는 사용하지 않고, M-1 소총 분해 결합에만 사용하였다.

나름 비중있게 다룬 무기이다.

3.3.2. 목총[편집]

1970 년대의 경우, 나무로 만든 M1소총 진짜 목총(木銃)이 사용되었던 적도 있다. 참조

1980년대에는 그 재료가 변하여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M1 개런드나 M16 모형이 사용되었다. 실제로 시커먼 플라스틱 덩어리에 무게를 맞추기 위한 철근이 총열에 박혀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모형 M16은 장전과 모의 사격 연습도 가능한 신모델이 출시되었다고 한다. 

고무 목총, 플라스틱 목총[12] 이 섞여서 존재했는데, 이 중에 플라스틱총이 훨씬 편하고 가볍기 대문에, 양 쪽 모델이 섞여있는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더 가벼운 모형총을 쟁탈하려는 선착순,제비뽑기,가위바위보,주먹다짐 등 각종 병림픽이 벌어졌다. 특히 본 수업의 내용이 총검술일 때. 심한 경우는 아예 쉬는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학생들이 교련복을 옷 속에 입고 다른 과목 수업을 받다가, 쉬는 시간 종이 치기가 무섭게 화장실조차 포기하고 우르르 달려나가 가벼운 플라스틱 목총부터 확보한 후에(..) 운동장에서 주섬주섬 옷을 챙기거나 다시 죽어라 달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무리들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아예 아카데미과학제 1:1 스케일 M16 프라모델을 사다가 조립해서 그걸 자신의 전용 목총으로 삼고 들고 다니기도 했다.[13] 다만 그 아카데미제 M16소총은 1980년대 기준으로 18,000원이라는 전혀 만만치 않은 가격이라서[14] 아무나 들고 다니지는 못했다. 비록 이 물건이 프라모델이긴 하지만 다른 프라모델과는 달리 교련수업에 전투화를 신고 가면 각반을 찬 것으로 인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서 교련 시간에 목총으로 사용한다고 갖고 다닌다고 말하면 일부 학교에 이걸 들고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15]

아울러 시골학교의 경우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까지도 목총을 학교 창고 등지에서 볼수 있는 학교도 있었다.

3.4. 교련 교사[편집]

한 마디로 학교의 똥군기 반장 -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근엄한 표정으로 등교시간에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리. 

남고의 교련교사들은 사실상 전원 교대나 사범대 출신이 아닌,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대한민국 해병대 예비역 장교 출신[16]이였다. 또한 이들의 학력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에 장교들 중에 3사 출신 장교들은 정식 교사 자격증이 있는 대학졸업자가 아니였다.[17]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앳된 남고생들에게 정통 군대 맛을 보여준다며폭력과 기합이 섞인 똥군기를 민간 고등학교 수업시간까지 적용하는 바람에.. 그 난폭함과 구타의 수준은 다른 과목의 교사들이 한 수 접고 울고 갈 지경이었다. 

교련교사들이 워낙 억세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의하는 다른 교사나 학부모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사례들도 무수히 많다.[18] 다른 정식 교사들 조차 교련교사는 대학도 안나와서 교단에 선다고 무시하기 일수. 체육교사 조차 교련교사를 무시했다.[19][20][21]교련교사들 역시 실습 시간에는 자신의 예비군 전투복 차림을 했으며, 취향(?)에 따라 이론 수업이나 사무실 등에는 일반 정장과 예비군복 차림이 갈렸다. 

교련 교사들의 폭력성에, 참다못한 학생 몇 명이 한 밤중에 얼굴 가리고 교련교사 집 앞에 매복하고 있다가, 잠깐 바람쐬러 나온 교련교사를 집단폭행하고 도망친 사례도 몇 건 있었다. 물론 졸업식 이후에, 교련 교사에 대한 차량 테러 건도 있었다. 

그 외에 교사 TO가 적은 지방 고등학교에서는 다른 과목 교사 중 ROTC나 부사관 경력이 있는 교사에게 교련 교사를 겸임하게 하기도 했다.

똥별 자녀들한테는 꼼짝도 못한다. 잘못건들면 그후폭풍 때문에 교련 교사들도 똥별의 자녀들한테는 극진대우. 1978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흥춘이가 있다. 소지품검사때 순한양처럼 아버님은 잘계시지 하면서 굽신굽신 거리고 흥춘이가 찍새랑 도박해서 돈을 잃었는데 이때도 당연히 흥춘이 편.

3.5. 수업 분위기[편집]

공포+똥군기+가혹행위+구타+막장+병맛+이뭐병+안전불감증[22]

일반적인 학생들은 교련수업 자체를 매우 싫어했는데, 밀덕이라고 좋아했을리는 만무하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교련교사들의 자질이 문제로 말미암아, 야외실습수업 시간에 그 정도가 극에 달했다. 공포분위기 속에서 완전 군대식으로 정렬해, 교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 태반이었고, 참조 조금만 줄이 틀어지거나 늦으면 무자비한 구타와 단체기합이 떨어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제식훈련, 포복, 총검술사격술 예비훈련 등의 동작이 틀리면 욕설은 애교이며, 반복해서 실수하는 학생들에겐 기합은 물론 무자비한 체벌과 구타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실외에서 하던 교련수업이 있던 시절의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상당수가 치를 떤다. 하루에 교련과 체육 두 과목이 동시에 들어있는 날은 피곤해서 수업을 못 들을 정도였다. [23]

여기에 더 병맛인건 대부분의 학교에서 고3이라도 교련만큼은 열외가 없었다. 고3을 위해 교양과목 시간을 자율학습으로 대체시켜도 교련만큼은 시켰다. 여차하면 니들도 근처 부대에서 실총받아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교련시간을 우직하게 준수하게 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면 이거 그냥 소년병이다.총검술로 싸울건가? 다만, 교육열이 슬슬 오르던 80년대 중반부터는 어지간한 고등학교들은 고3이 되면 교련, 체육은 교실에서 자습하거나 놀라고 축구공과 농구공주고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 미술은 당연히 자습..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한숨만 나올 따름. 심지어 성인도 아닌 미성년 남학생들에게 군대식 문화와 심한 폭력을 가하는걸물론 성인에게도 하면 안된다보다못한 학부모들의 반발이 있을 경우, 한 술 더 떠서 군대 가면 이보다 더 심하게 다루는데 이것도 못 참으면 어떻게 한국에서 살아가냐고 오히려 불러놓고 훈계까지 한 경우도 많다. 결국 이런 정신력 드립이 곪아서 터진것이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 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보충역 또는 면제를 받아 군대에 안 갈 학생들에게도 이런 짓거리를 했었다(...).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은 현역병이 받는 모든 훈련 중 실총사격 이외의 모든 훈련을 받는 고등학교까지 존재했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커리큘럼에 실제 현역병이 받는 기초군사훈련 대부분이 들어있었다.[24]

교과 과정상에, 학생들이 군인들처럼 일종의 검열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것도 분열 검열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사장이 장군 출신인 경우에는 이러한 행사를 매우 좋아하기까지 했다! 70~80년대에는 사열대에 교장과 교련 교사가 서있으면, 학생들이 학급마다 줄을 지어 행진하고 우로 봣!하는 구령에 맞춰 교장과 교련 교사는 이를 보며 경례를 하고 지나가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더 심하면 군용 지프차를 동원하기도 했다. 참조

3.6. 비판[편집]

말이 교련이지 사실상 학생을 가지고 군인을 만드는 짓을 20년 넘게 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그 군인 만드는 짓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교련 과목이다

3.6.1. 병영 국가화와 정권안보교육[편집]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전 국가를 군대식으로 통제하는 병영사회를 목표로 한 것으로, 매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것이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막장으로 치달을때 한 짓. 고등학생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으리란 시각도 있다.

중/고교 과정에 군사훈련과정이 포함된 나라들이 없지는 않다. 한국에선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가 기본적인 도수제식 수준을 유지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25] 미국에는 사관학교식 시스템을 가진 사립 군사고등학교들이 나름 명문고 행세를 하고 있고 JROTC 과정도 있으며, 영연방 국가들에는 cadet과정이 있다. 일본만 해도 과거에 자위대생도라고 부사관 양성 과정을 뒀으며 육자대의 기술부사관을 양성하는 고등공과학교를 여전히 운영 중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해당 과정을 선택한 학생에 한하는 것이고, 총기 관련 훈련도 사격체험 이상의 것은 시키지 않는다. 미국의 유년사관학교도 불량 학생들을 재교육 시키는 군대라는 인식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영화 생도의 분노나 미국 드라마 NCIS 시즌 12 에피소드 14를 보면 얼마나 막장인지 잘 알수 있다. 후자는 사건 관계자 90%가 개노답이므로 집단괴롭힘에 시달린 사람이 보면 혈압 오를 수 있으니 주의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모든 학생이 육군 훈련병 수준의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였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성년자에게 군사훈련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대표적 집단은 바로 북한이다. 중국은 학교마다 다르고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대학생의 군부대 입소 교육도 4년간 한차례이다. 이란은 현지 중학교 3학년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 때 교련을 받기는 하는데 남학생만 받는다.

3.6.2. 교련 교사의 자질[편집]

앞에서 밝혔듯이, 교련교사들은 사범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예비역 장교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들이 60~70년대의 한국의 군사문화를 그대로 여과없이 고등학교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들의 교육자적 자질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많은 수의 교련교사들이 3사[26] 출신 장교였는데, 70 년대에는 고졸장교를 양성하였던 곳이라, 교직 과목 이수는 물론 학사학위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같은 학생부 활동을 하던 체육교사들 마저 은근히 교련교사들을 무시하는 정도였을까....

또한 그들의 학문적 깊이나, 지식석 수준이 높지 못해서, 교련교과서 내용 자체를 정확하게 강의 조차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였다. 교실 수업시간은 애들 시켜서 그냥 교과서 한번 읽는 수준 수준.... 

물론 케바케에 따라, 그러한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정규 대학 과정을 졸업하고, 학생들을 사랑이 아닌 의리로 훈육하던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다고는 한다. 

3.6.3. 교과 내용과 수업의 부적절성[편집]

고등학생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치고, 대공사격 요령, 소총탄의 종류등을 외우게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정말로 잘 생각해 보자. 물론 교과서에 적의 목을 벤다 라는 문장이 있을 정도였으니...

한편, 당시 고등학생들은 내신 한 등급과 학력고사 1~2점에 대학이 갈리는데, 다른 과목은 잘 하는데 교련수업을 못 따라가 내신등급이 깎여 개피를 본 상위권 학생들도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명문대를 가고 싶어서 내신을 완벽하게 하려면, 교사의 폭력을 감수하며 구령에 따라 동작 맞추는 제식훈련 잘 하고, 사람 죽이는 총검을 잘 휘두르며, 땅개처럼 구르는 포복과 각개전투를 잘 해서 점수를 따는 것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모든 남학생이 사관학교를 가거나 현역병이 될 것도 아닌데 저런 걸 잘 하는게 명문대생, 나아가 대학생의 자질과 무슨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학생이나,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모든 학생이 현역병으로 입영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학생들은 문제가 더 심각해서, 모의총기건 뭐건 간에 어쨌든 집총을 하는 교련수업을 거부해 마찰이 많았으며, 보통 이 경우 실기 점수를 0 점 처리하거나, 심한 경우는 자퇴를, 더 나아가 아예 퇴학마저 당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일반인으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교련교과서를 거의 볼 일은 없지만[27][28] 사실과 다르게 너무나도 노골적인 이스라엘 찬양이 돋보였으며, 왜곡도 심했다.[29] 이스라엘이 지금도 약소국인데[30] 정신력으로 아랍 연합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만 집중했다. 왜 일본군을 집어넣지 그래? 

더불어 아랍인들은 중동전쟁 당시 무조건 해외 유학생들은 달아났고, 이스라엘 유태인 유학생은 무조건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귀국했다는 것만 썼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 항목에서도 나오는데, 유태인들이 전부 그런 게 아니였으며, 아랍인들도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귀국한 이들도 적지 않았음에도, 이스라엘만 편들어주었다. [31]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비록 우리의 동맹 미국도 여차하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친다고 교과서에 나오기도 했다. [32][33][34]

하지만 이런 내용의 교육들이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교련 과목이 폐지되기 직전에는 대북 정신교육을 가르치거나 혹은 교련 교사들이 죄다 베어 그릴스로 변모하여 등산계획이라든가 조난 당했을 경우 생존방법, 구급법, 캠핑 같은 훨신 현실적이고 유용한 정보들을 가르쳤다. 심지어는 학기 내내 운전면허 필기고사의 내용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졸업하면 바로 운전면허 딸 거 미리 배우고 좋네. 운전면허 필기시험내용은 자동차 기본에 도로교통법이고 이런 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식이 맞으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어 덧붙인다.
1. 친이스라엘적인 논조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개신교계에 이스라엘민족과 한민족을 "고난"과 "구원" 관점에서 오버랩해 보는 목사가 많았던 점도 있다. 그리고 소수가 다수를 당해 내야 하는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고, 그래서 이긴 좋은 사례가 이스라엘이므로. "다윗과 골리앗"이란 비유가 뜻하는 것은 80년대까지는 교련교과서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통해서, 교련교과서가 아니라도 출처는 많았다. 물론 2000년대 군사 정훈교육에서도 쓰이면서 비난받지만.
2. 미국에만 기대지 말자는 논조는, 운동권의 반미 구호는 70년대까지는 언급할 만 한 게 못 되었고, 오히려 시민사회가 미국이 어떻게 해주길 바랐고 당시 정부가 10월 유신, 미군철수반대, 한국군 전력 강화를 두고, 당시 월남 상실 이후에 중국과 화해 외교를 하던 미국 정부와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6.4. 군사적 가치 없음[편집]

대한민국이 북한과 전쟁을 수행한다고 가정할 때, 미성년자인 고등학생이 동원 되는 사태가 오면 정말 대한민국은 벼랑 끝 까지 몰린 상황인거다.

전방의 현역병의 전력이 모조리 전멸하고, 동원예비군은 물론이거니와 , 향토예비군 그리고 민방위 편성 대상자까지 개발살났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이들만 합쳐도 500만이다. 주한미군은 빼자 전쟁이 길어지면, 고3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미성년 리미티 해제가 풀리며 징집 연령에 해당할지 모르지만...지못미

설명을 덧붙이면, 예비군+현역 총 병력은 인구감소와 군병력 감축에 따라 현재로서는 400만명 아래고, 십여 년 안에 200만 명대 중반까지 떨어지게 된다. 또한 예비군이 얼마나 많더라도 예비군은 전시에 모두 동원되지 않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이 평시에 어디 짱박혀있는 게 아니라 국가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국이나 일본처럼 전장과 이격된 나라가 아닌 이상, 남성 민방위까지 전투병력으로 편성해 내보내고 여성만으로 공장과 본토 지원부대를 돌릴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나 대학생이고 거의 누구나 군전역 직후에 대학생활로 복귀하니까 좀 다르지만, 학생예비군 동원은 정책적으로 후순위다. 그런 점에서 군필자가 오백만이든 몇백만이든 군미필 고졸자 징집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쨌든 현역 고등학생까지 동원할 일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국가막장상황이 맞다. 다만, 과거를 보면, 6.25때는 첫 반 년 동안 만 16세 이상 고등학생을 징집했다 소집해제한 적 있다.

4. 여자고등학교 교련[편집]

여자고등학교의 교련수업은 주로 비전투 보조원으로서의 역할을 가르쳤다. 응급처치법이나 부상자 이송 같은 것을 배우고 시험을 쳤는데 손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붕대 감는 여러가지 매듭법을 익히는게 고역이었다고 한다. 또, 부상자 이송은 같은 반 급우를 업고가는 식이기는 해도 여학생 체력으로 쉽게 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고 한다. 물론 실전에서 급우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남자 현역 장병들을 제대로 이송할 수는 없었을테니 남학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가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다. 

그냥 남자들이 하니까 구색 맞추려고 따라 시킨 것에 불과하다.

보다 더 상세한 내용 추가바람

5. 대학교 교련[편집]

파일:moomoodae.jpg
이른바 문무대(文武臺)와 전방입소 훈련. 훈련을 받는 육군학생군사학교[35]의 별칭이 문무대였던 탓에, 대학 교련이란 말보다 문무대 훈련이란 말로 더 유명하다. 대학교에서도 3학점으로 비슷했으며, 1970년대엔 군필자 포함, 이후엔 군입대 예정자에 한해 필수과목이었다. 즉 신체검사에서 제2국민역이나 면제 판정을 받았다든지, 여자라든지, 이미 군대 갔다 왔다든지 하는 경우는 교련 이수 대상자가 아니었다. 대학교 때 교련수업에 참여하지 않아 교련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강제 입영되기도 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교련을 독재정권의 학생통제수단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다가 단체로 강제 입영된 경우도 많았다.[36]

문무대나 전방입소 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학교 총장이 해당 육군 부대를 방문하곤 했다. 특히 지거국 총장의 경우 사단본부에 4성기가 게양되고, 군악대는 장성에 대한 경례를 육군 4성장군에 맞게 연주했다. 그리고 진짜 4성장군처럼, 대학교 총장은 사단장의 영접을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했다고...(...) 대학교 총장이 아니라 참모총장인듯 지방 거점 국립대 및 종합 국립대 총장의 의전은 무려 장관급, 즉 군인에 대응하면 실제 대장 계급에 상당하기에 저런 대접을 한 것이다.

5.1. 문무대 훈련[편집]

대학교에 입학하는 1학년 남학생들은, 성남에 있는 육군학생중앙군사학교에 70년대에는 9박 10일, 80년대에는 5박 6일 동안 소집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입소하는 남학생들을 위해서 여학생들이 초콜릿사탕담배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교련복을 입고 입소하여, 군복으로 갈아입고 얼차려부터 시작해 짧은 기간내에 유격총검술화생방 등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과시간이 무척 빡빡했다. 학교 분위기에 따라 또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그 훈련의 강도는 점점 약해졌다. 

문무대 내에서도 학생들의 집단 행동이 있었다. 고대의 자랑...
추가바람

5.2. 전방입소훈련[편집]

대학교 2학년 남학생들이 전방의 육군 부대로 5박6일간 입영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제도. 88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추가바람

5.3. 복무단축 혜택[편집]

1, 2학년 교련과목을 이수하면, 무시못할 혜택이 있었다. 바로, 현역병인 경우 문무대 훈련과 전방입소 훈련을 다 마치면, 복무기간이 무려 3개월 단축되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6개월이나 되었다가 줄어든 것이다. 이는 문무대 훈련을 거부한 운동권 간부들이 막상 문무대 훈련장에 떡하니 나타나 군복무 단축혜택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운동권에 대한 회의감이 폭발했다는 증언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혜택이었다. 개꿀. 80년대 당시, 육군 현역병의 복무기간이 30개월이였는데, 3개월 혜택을 받으면 27개월만 복무하고 전역하였다. 문무대 1 주일 + 전방입소 1주일과 말년 3개월의 등가교환(?). 실감이 나지 않는가? 2개월 고참보다 1개월 먼저 전역한다는 무서운 사실!! 이 때문에 고졸 이하 학력으로 그 혜택을 못 보는 이들의 말년 히스테리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만땅 병장과 혜택 병장이 한 내무반에 섞여 있는 경우, 분위기 매우~~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전역 일자만이 아니라, 그 2개월 안에 육군에 갔다면 유격훈련혹한기 훈련 등이 있을 수도 있으며, 복무기간이 좀 더 긴 해공군 입대자의 경우 거의 육군 입대자와 엇비슷하게 전역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대학 다니다 온 현역병들은 입대 직후 대학생 출신임을 가급적 숨기다 행정병 등이 알아내고 퍼뜨려 되려 선임들에게 피보는 경우도 있었다.

1학년 문무대훈련만 마치고 입대할 경우 절반인 45일 단축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보충역 판정을 받아 방위병소집 대상인 경우, 1학년 문무대 훈련을 마치면 10일, 2학년 전방입소훈련을 마치면 20일 단축혜택이 주어졌다. 

복무단축 혜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역병

방위병

문무대

45일

10일

전방입소

90일

20일


대학교 87 학번은 87년대 문무대, 88년도 전방입소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에 따라 총 90일 혜택을 받을수 있었으나, 88 학번인 경우에는 88년도에는 문무대 입소를 하였으나, 89년 전방입소교육이 폐지됨에 따라, 45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간혹 8X학번임에도 불구하고, 문무대 입소를 거부하여혜택을 못 받는 이들도 있었는데자대에서 심히 바보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복무단축 혜택으로 인해서, 당시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군입대 하는 보편적인 경향이 있었다. 3수생인 경우 입영연기가 불가능한 경우, 1학년만 마치고 입대하는 경우, 전방입소훈련을 마치지 못했다. 현재처럼 그냥 빨리 갔다오고 치우려고 가급적 1학년 1~2학기 마치고 군휴학 내는 분위기는 이 두 훈련이 폐지된 이후 보편화됐다.

5.4. 전방입소 거부투쟁[편집]

당시 대학교 내에서 전방 입소는 반공 교육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고, 운동권에서는 교련을 미제용병훈련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1986년 4월 전국의 대학에서 전방입소 거부 투쟁이 일어났다. 그 해 4월 28일 서울대학교에서 김세진, 이재호 두명이 분신하면서 이러한 투쟁은 정점에 달하였다. 당시 군사독제체제 하에서, 모든 남자대학생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의 참여도 상당하였다. 

결국 87년에는 전방입소가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다. 당시를 보도한 MBC 뉴스 그러나 말로만 선택이었지 일단 전방입소를 거부하면 병역특례 편입이나 복무단축도 불가능하고 입영연기도 취소하고 당시 졸업예정연도까지 연기되던 신검의 연기 혜택도 취소되어 입영해야 하는 일종의, 군사독재의 말기 발악적 눈속임이었다. 87년 초 당시 전방입소에 많은 학생들이 전방입소를 거부하고 다만 교련 간부 학생들만 대다수 학생들의 거부 사실과 사유 등을 해당 전방 부대에 전달하는 차원에서 입소했지만 전경을 동원한 검문 수색 등으로 인해 거의 전부 당일 0시 이전에 입소 부대로 끌려 갔다. 그리고 연병장에 라이트 켜놓고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원산폭격 등의 기합을 받았다. (지금이야 입소하면 다 그런 기합 받으면서 신교대로 들어가긴 하지만) 그 직후 6월 항쟁이 성공하고 교련 폐지가 결정되었고, 군사교육 거부자들은 같은 학점의 교양과목을 이수하면 구제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교련 1(학과 및 교내 실습 교육), 교련 2(문무대 입소),교련 3(전방입소) 모두 한학기에 1학점 씩이었으며 2회이상 무단결석 교관에 대놓고 반항 등 F학점 사유시에는 군사교육 거부자(학적부에 기재) 및 학변자 처리, 다음 연도에 단축혜택 없이 입영되었다. 현재 각 기업체 중견임원이나 CEO급으로 있는 당시 대학생들은 따라서 군경에 대한 거부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6. 폐지[편집]

대학교 교련은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린 후, 1988년 11월 25일 폐지가 결정되었다.관련 자료 이에 따라 복무기간 단축 혜택도 없어져서, 대학생들이 2학년을 마치기 전에 입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37]

고등학교 교련은 민주화가 진전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 단계적으로 사라져갔다. 이전까지 국방부가 출판하던 교련 교과서는 문민정부 첫 해인 1993년에 교육부가 출판하였다. 문민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교련 교육과정 개편에 착수하여 1994년부터 제식훈련을 제외한 군사훈련 부분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하였고, 실습 내용은 구급법 등으로 대체되었으며[38], 2002년부터 적용된 7차 교육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변경[39], 이 때부터 고3때 교련이 잡히는 경우는 최소한의 실습 정도만 하고 다른 교양 과목들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자습과 교련교사의 군대 이야기 등으로 보냈다. 2011년부터 적용된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교련과목을 가르치던 교사들은 남교사의 경우 체육, 도덕, 사회 등 관련과목 교사자격연수를 받고 그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여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과목을 변경하거나 양호교사로 남게 되었다. 여학교의 교련 담당 여교사는 대개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가 의무복무를 마치고 퇴역한 예비역 간호장교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또한 교련 교사들도 더 이상 수업 중 군복류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다.

7. 외국의 교련[편집]

중국도 교련 수업이 있으며 현재도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겉핧기식 교육에다 교련 교사들의 자질 문제까지 대두되며 폐지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심지어 2014년에는 교련 교사가 만취 상태로 수업중에 여학생들을 희롱하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당시 학부모들이 교련 수업을 폐지하여야 하는 근거로 든 이유들을 보면 우리나라 교련과 매우 비슷한 형태로 수업이 행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의외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훈련이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북한 남녀 학생들은 아예 고등중학교 4학년(15세)때부터 붉은청년근위대라는 군대에 편입되어 일년에 일주일씩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학에 가면 교도대로 편입되어 6개월간 군생활을 해야 하므로 따로 학교에서 교련을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든 우리나라나 중국의 교련과는 달리, 북한의 학생 군사훈련은 상당히 본격적이며 산악행군, 사격, 총기수입 등 실용적인 프로그램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남학생들만 교련 수업을 받는다. 8학년부터 주당 1시간.

미성년자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나라는 의외로 이게 전부다. [40] 스위스나 이스라엘처럼 징병제가 있으며 안보에 신경쓰는 나라들도 군사 훈련은 성인에게만 실시한다. 



[1] 4.19 혁명의 주체로 흔히 대학생들을 꼽지만, 선두에 섰던 고등학생의 수도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김주열 학생부터가 고등학생이었으니... 고등학생의 교련 폐지는 당연한 수순인 셈이었다.[2] 단, 학도호국단의 완전 해산은 1986년이다.[3] 1968년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까지 터진다.[4] 1.21 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군복무를 했던 예비역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신조도 어쨌든 전직 군인이었든 만큼, 군말없이 폭행을 감수했다고 한다(...)[5] 체육 시간을 기존 주 4시간에서 3 시간을 줄이고, 교련을 주2시간으로 신설한다.[6] 당시 체육 시간이 4~5시간이었던 이유는,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것도 있었지만, 학력고사 체력장 시험이 있어 체력장연습을 위해 그렇다. 그래서 체육이나 교련을 무시못하던 이유.[7] 방독면이 학교에 없어서, 눈으로 입으로만 방독면을 착용했다북괴군이냐?.[8] 어째서인지 교모 턱끈을 턱이 아니라 입술 밑에 거는 기괴한 패션을 시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일본군의 잔재가 남은 것이다. 현재 일본 자위대도 사열식 사진을 보면 정모나 철모 턱끈을 입술 밑에 걸고 있다.[9] 육해공군 중 어디 출신이든 관계없다.[10] 가끔 1960~199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하는 드라마를 보면 남자 배우들이 얼룩무늬의 상하의를 입은게 보일것이다. 이게 교련복이다. 또한 교내에 있을때도 교복 대신 교련복을 입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선생들이 교내에서 체육복 입는건 아니꼽게 봤지만 교련복은 그냥 교복처럼 입어도 뭐라하지 않았다. 모르고 보면 교복같다[11] 학교에 따라 베레모, 검정색 교복에 있는 착용하는 교모, 혹은 팔각모 등이 있었다.[12] 여기서 목총은 Mock총이다. 막타워를 말하는 Mock Tower 의 목![13] 탄창은 학교에 가져오지 않았으며 애초에 조립할 때부터 순정 무게추는 부착하지 않고 그냥 순수 플라스틱 부품으로만 조립했다.[14] 아카데미 M16은 1987년 출시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 중산층 고교생의 한 달 용돈이 2~3 만원 정도였고, 소형차는 450만원 정도였다.[15] 모든 학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16] 일제의 경우, 사범학교에 배속된 교련교사는 대개 현역 일본 육군 소좌였다. 예비역도 아니고 현역을 학교에 박아놓은 것이다. ㅎㄷㄷ[17] 인터넷 상에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는 글 중에, 개념 교련선생님의 글이 간간히 보이긴 한다. 계속 공부를 해서 정식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을 의리로 보살핀 교련선생님..[18] 신기한건, 학부모들이나 다른 교사들에게 폭력을 써도 학교에서 잘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설사 징계를 받더라도 타 학교로 옮길뿐, 이런 면에선 굉장히 꿀보직이었다.[19] 교련과목이 존재하던 시절의 기사만 살펴봐도, 교사체벌로 인해 일으킨 사고사례 중 다른 과목에 비교해서 교련과목 교사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편이다.[20] 비하의 의미는 아니나, 진급에서 탈락한 초급장교(잘해야 소령 전역) 출신이다보니 행실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다.[21] 사람들의 편견이 너무 심한것중 하나가 체육교사인데, 체육교사라고 다 좋은건 아니다. 임용경쟁률이 타 과목에 비해 제일 높은 편이고 상기하다시피 높으신 분들이나 학생들의 편견으로 은근히 무시받는게 체육교사다. 자세한건 체육교사 항목 참조.[22] 사실 옛날 지금처럼 학생인권조례나 학교폭력 등으로 인한 교육 문제가 이슈가 되기 전이라 묻혀서 그렇지, 사실 안전불감증 문제 심하다. 징병검사하면 티나는 공익/면제로 판명받을것 같은 학생들도 예외없이 가차없이 시켰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그런 학생들에게 생명에 지장만 안간것도 천만다행인 수준.[23] 특히 무더운 여름날 5~6교시에 체육+교련 이렇게 수업받는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4] 그래서 좀 심하게 굴리는 학교는 뙤약볕 밑에서 교련복 입은 학생들에게 낮은 포복을 시키기도 했고, 동네 뒷산에서 각개전투를 시키기도 했다.[25] 원래 사관학교와 비슷하게 군사훈련을 시행했었으나, 소년병을 금지하는 유엔협약에 따라 폐지한 것이 겨우 20년 전의 일이다.[26] 지금은 3사관학교를 졸업하면 학사학위를 수여함[27] 교실수업은 비오는 날만 골라 한두번으로 끝낸다. 그것도 비오는 날이 없으면 아예 안 보기도 한다.[28] 사실 교련교과서 내용을 가만히 뜯어보면 전투나 화생방, 생존술에 관한 부분 자체는 알아두면 상당히 괜찮고 군대에서 보조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밀덕이라면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있다.[29] 군대에서 하는 정훈교육도 노골적인 이스라엘 찬양이 돋보인다.[30] 사실 그건 독립 직후인 이스라엘 독립전쟁때 한정이고 전후 이스라엘 자체적인 역량강화와 미국의 지원으로 7~80년대에는 이스라엘은 아랍지역 최강 군사대국이었고 지금도 세계 최상위권의 군사강국이다.[31] 당장 이스라엘의 영화배우인 바 라파엘리는 병역기피성 결혼 후 면제 판정을 받자마자 이혼한 이스라엘 여자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징집 대상이지만 결혼을 일찍하면 병역이 면제된다.[32] 당시 기준으로도 반미로 보일만도 한데, 사실 이 부분만 보면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국제정치 외교관계라는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도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거니까 고정된 동맹, 적대 관계가 어딨어? 그때 그때 변하는거지! 당장 한국만 해도 조선 후기엔 신미양요로 미국과 적대국이었지만, 지금은 군사적 혈맹관계인걸 생각해보자. 물론 정신 좀 나가신 수꼴 친미들은 이런 걸 종북이라고 발악하며 부정하고 영원한 미국느님이라고 착각에 빠져있다는 게 문제...[33] 정확히 말하자면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미국이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지만 영원한 우방이 아니라고 나온 것. 더불어 일본이 가장 통일을 반대한다고 서술되었는데 90년 초반에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 점을 거론하며 교련이 반일이라고 발악하며 비난한 글을 쓰기도 했다.[34] 캄보디아 수상이던 마타크(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으나 거부하고 남아 크메르 루주에게 끔살당했다. 이 편지 내용은 죽어도 내 사랑하는 조국에서 죽겠다면서 당신 미국만 믿던 멍청한 나를 영원히 혐오하면서 죽는다는 후회가 잘 나와있었다.)의 편지를 일부 싣으면서,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만 믿다가, 이 꼴 난다고 강조하던 바 있다.[35] 당시에는 성남에 위치해 있었다.[36] 검색엔진에 "전방입소 거부"를 치면 꽤 많이 나온다. 1970년대에는 학생인데 무신 군사훈련이냐!하는 입장이 많았고, 1980년대에는 반미 사상이 많이 퍼져서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거부!가 슬로건이 되었다. 흠좀무... 시대에 따라 입장 변화가 약간 있다. 유신 시절에는 여자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 많은 학과의 절대 다수가 남자였는데(특히 경영학과나 공대는 여학생이 잘 해야 1명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식으로 교련을 거부하다가 한 학과의 한 학번 전체가 강제입영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특정 학과 특정 학번 사람들이 아예 사라져 학사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7] 1, 2학년에 교련 과목을 이수하면 복무기간 단축 혜택이 있었으므로, 대부분 2학년까지는 다닌 후 입대했다. 심지어 의대생이 복무기간 단축을 위해 군의관 대신 의무병으로 입대하기도 했다.[38] 즉, 남학생들은 1977년생까지 교련복을 입어야 했다는 소리다!, 다만 당시 분위기가 교련의 완전한 폐지로 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교련복 착용 없이 수업을 진행한 학교가 많았다.[39] 교련을 선택하는 학생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교양 선택과목은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 은근히 오래 살아남았다.[40] 이 밖에도 청소년, 심지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 소년병으로 써먹는 막장 사회도 많지만, 그걸 교련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류

 


'[한신대학교 석박사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업능력개발훈련 수강증명서  (0) 2017.03.24
KB 손해보험 자동차업무 부장 김은회  (0) 2017.03.23
일반 윤리학  (0) 2017.03.22
윤리응용  (0) 2017.03.22
사회복지사 3급  (0) 2017.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