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석박사과정]

[스크랩] 마르크스 이야기

한신학 han theology 2016. 12. 20. 12:41
 

마르크스 이야기



세계를 변혁하는 철학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 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개혁하는 일이다.”


  20세기가 들어서자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사회주의체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꿈꿔왔습니다. 16세기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모든 시민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하면서, 누구나 생산한 물건은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고, 공무원은 선거로 뽑습니다. 그는 인간이 이런 사회를 만들이 못하는 것은 농업(신석기)혁명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사유재산제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서유럽의 자본주의 나라의 상황은 암울했는데, 노동자들은 아주 가난했고, 거지들은 날로 증가하는 등 커다란 사회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버트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은 사회악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이러한 사유재산제도라고 매서운 비판을 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사유재산제도의 비판은 물론 이 제도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체제가 멸망하고 공산주의체제로 넘어가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생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이 개인의 손을 떠나 사회 전체의 것이 되고, 인간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균등하게 나누어 받습니다. 즉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의 결사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최초로 시도되었던 이 그림 같은 환상은 결국 처참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서적이나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이름만 언급하여도 커다한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의 실험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겠지만 실패(물론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가 아닌 그것을 핑계로 하여 권력을 숭상하였던 무리들의 실패)로 돌아갔고, 철학이 사회체제 근본을 흔들었던 그리고 변혁시켰던, 그리하여 세계사를 동서로 갈라놓았던 그 엄청난 사건(철학이 세상이 이토록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최초가 아닌가 합니다.)은 이미 과거완료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암울했던 그 끝자락의 시절을 대학에서 보냈던 저로서는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를 단지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었던 빨갱이의 사상가로서만 볼게 아니라 학자 또는 철학자로서 한번쯤 접근해 보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좋은 공부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그 사상의 형성


  플라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제기된 논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마르크스 이전까지는, 철학은 언제나 현실세계와는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 즉 생각하는 영역 속에 머물러 왔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마치 철학이 한 단계 낮아지는 것처럼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한 생각을 고집했던 철학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의 도전은 세계정치에 미친 영향으로 볼 때 20세기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고, 그래서 또한 그 어떤 철학자보다 현실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순수 철학에 대한 성공적인 도전자입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처럼 사람들의 칭송과 사랑, 비난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또한 철학사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처럼 강력한 현실의 힘을 가졌던 사상 역시 없었습니다. 그는 1818년 독일 서부 라인 지방의 ‘트리어’라는 도시에서 프로테스탄트교로 개종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뭇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박애 정신(그의 초기사상을 휴머니즘이라고 평가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1835년 ‘본’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다가 이듬해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3세 때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비교(고대 유물론에 관한 논문)하는 것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헤겔 철학에 심취하였고, 이상적 사회주의자인 생시몽과 푸리에(1772~1837; 프랑스 이상적 사회주의자. 생산자 협동조합인 ‘팔랑주’를 통하여 상업이 없는 자유로운 생산자의 연합으로 구성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함. 팔랑주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대학을 졸업한 후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라인신문; 1842년 1월 독일에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 신문. 1843년 당국에 의해 폐간>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언론의 검열로 인해 1년 만에 그 일을 그만두고 그와 오랫동안 교제했던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여 1843년 프랑스 파리로 떠났습니다.


  당시 정치 혁명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들과 접촉하여 아주 급진적인 사상가로 변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독불연보; 獨佛年報, 1844년 2월 파리에서 창간한 급진적 신문. 급진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놓인 마르크스의 사상을 볼 수 있다.>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고, 평생의 벗인 엥겔스(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의 친구로 그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등을 집필하였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 ‘자본’의 2, 3권을 편집, 출판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와 더불어 혁명 운동에 뛰어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독일의 철학에 프랑스의 사회주의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고 1년 후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추방되어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합니다. 그는 여기서 국제공사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그 강령의 초안을 작성합니다. 그것이 바로 1848년 2월 혁명 직전에 발표되는 <공산당 선언>입니다.


  마르크스는 1849년 다시 브뤼셀에서 추방당해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영국은 정치 운동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나 공업이 발전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경제학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엥겔스의 지원을 받으며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무척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자신의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간장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매일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서 자료와 씨름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자식이 죽기까지 했지만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마침내 1867년 그의 역작인 <자본> 제1권을 출간해 냅니다. 그는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밝히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시합니다. 원래 총3권으로 계획된 이 책은 마르크스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고, 엥겔스에 의해 제2권과 제3권이 각각 1885년과 1894년에 출판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무척이나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의 사후 백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고 자본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을 거부하였고, 세계를 만드는 철학을 원했습니다.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어쩌면 공상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러한 ‘이상’이 있기에 우리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19세기의 아나키스트

~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고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온갖 억압과 강제를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유의 획득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데, 19세기 사상은 ‘자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입장이 갈리기도 한다. 프루동(1809~1865), 바쿠닌(1814~1876)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철학의 전환


  마르크스는 독일에 있을 당시만 해도 독일 관념철학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청년기에는 헤겔에 경도(傾倒; 온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거나 열중함.)되어 역사를 목적을 향한 지속적인 발전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역사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 철학에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 ‘기독교의 본질’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種으로서의 삶’을 언급, 이것을 인간 고유의 독특한 특징으로 여긴 것은 인간이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헤겔을 다시 땅으로 끄집어 내렸고, 마르크스는 그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그는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를 기본원칙으로 삼아서 진정한 유물론과 실증적 학문의 기초를 닦음.)의 유물론(唯物論;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적 철학에 감화 받아 관념론 철학을 비판하게 됩니다. 포이어바흐는 이성 또는 정신에 대한 물질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먼저 있고 그것에 따라서 정신적인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세계의 근본적 실재는 절대정신이나 신과 같은 것이 아닌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역사란 헤겔이 주장한 것처럼 ‘절대정신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물질적인 환경 속에서 그것을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실현해 내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론적 사상과 헤겔이 변증법이야말로 청년기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상의 기초입니다.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시기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머물 당시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프랑스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 파리는 유럽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급진적 정치 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푸리에, 프루동(1809~1865;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가. 그의 사상은 파리코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시몽, 바쿠닌(1814~1876; 러시아의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 등의 정치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가들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계급 문제에 몰두하게 됩니다. ‘계급’은 당시의 핵심적인 정치 개념인데, 단순히 정치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경제, 사회적 배경에서 출발한 개념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답게 정치란 다름 아닌 경제 구조의 표현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1845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독일 이데올로기; 엥겔스와 공동으로 1845년에 쓴 책. 헤겔주의와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비판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골격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전의 이론적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산주의 사상을 확립한다.>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845년에 쓴 포이어바흐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테제들. 11개의 테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테제들에서 철학의 전환을 꾀한다. 그것은 철학에 실천의 개념을 도입하여 이론적인 철학을 실천적인 철학으로 바꾸어 내려는 시도였다.>는 바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적 전환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정치, 법률, 종교, 사회관계는 경제적 관계의 반영일 뿐입니다. 세계의 기초는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정신’도 아니고, 포이어바흐가 말한 것처럼 ‘인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물질적 생산 속에 있을 뿐입니다. ‘정신’이나 ‘관념’ 또는 포이어바흐가 말한 추상적인 ‘인간(Human; 대문자로 표기된 인간은 형이상학적 실체와 비슷한 것)’은 세계의 본질일 수 없습니다. 세계의 기초를 알고 싶다면 인간의 생산 활동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결국 마르크스는 독일의 철학과 이중적으로 단절하는데, 즉 헤겔의 관념철학을 결정적으로 버리면서 포이어바흐의 형이상학적 유물론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비로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주어진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전통적 철학의 종말을 선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철학적 실천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바꾸는 철학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원했던 역동적인 철학의 모습이었습니다.


※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체계를 뒤집음으로써 자신의 유물론을 탄생시킨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주체인 절대정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정신이 아닌 물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헤겔의 철학을 뒤집고 물질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입으며 무슨 일을 하느냐가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좌우한다고 보는 이 이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물질의 양과 질 또한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를 갖는데, 즉 양은 질을 개선하고 질은 다시 양을 변화시킨다. 하나의 씨앗은 싹이 생길 때 씨앗을 부정되고, 이 씨앗의 부정으로 돋아난 싹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시 새로운 씨앗을 통해서 부정된다. 여기에서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정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더 많은 씨앗으로 나타난다.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발전단계는 인간의 역사 발전단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는 입장이 곧 ‘역사적 유물론’이다. 인간의 역사 역시 ‘비판’과 현실의 부정을 통해서, 곧 투쟁을 통해서 발전한다. 즉 경제를 지배하는 사람이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를 좌우한다는 주장이다.


쉬어가기 ; 수술하기 쉬운 사람

외과의사 4명이 카페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의사가 수술하기 쉬운 사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나는 도서관 직원들이 가장 쉬운 것 같아. 그 사람들 뱃속의 장기들은 ‘가나다’ 순으로 정렬되어 있거든."

그러자, 두 번째 의사가 말했다.

"난 회계사가 제일 쉬운 것 같아. 그 사람들 내장들은 전부 다 일련번호가 매겨 있거든."

세 번째 의사도 칵테일을 한잔 쭉 마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전기 기술자가 제일 쉽더라. 그 사람들 혈관은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잖아."

세 의사의 얘기를 듣고 있던 네 번째 의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을 받았다.

"난 정치인들이 제일 쉽더라고. 그 사람들은 골이 비어 있고, 뼈대도 없고, 쓸개도 없고, 소갈머리 배알머리도 없고, 심지어 안면도 없잖아."



마르크스주의의 성립과 발전


  1845년 이전의 마르크스는 서서히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파리에서 집필한 미 출간 저작. 경제학과 철학의 원리를 통하여 소외된 인간의 노동 문제에 접근하였다. 대작 ‘자본’의 출발점이 되었다.>에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인간을 노동하는 유적 존재라고 정의)’ 으로 정의 하고 그 노동 속에서 인간은 ‘소외(청년기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해 낸 자신의 생산물이 자신에게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한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여 소외된다. 곧 자본주의적 노동은 자기의 실현이 아닌 자기의 부정이 된다.)'된다고 주장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 소외는 대다수의 사람인 노동자의 소외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물 속에서 자신을 실현시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생산해 낸 생산물인 상품이 노동자와 대립하는 존재로 나타남으로써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가 생산해 낸 상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장에 나가 상품이 되지만 노동자는 그것을 살 만큼의 돈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상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노동자는 소외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노동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흔적, 즉 인간주의적 형이상학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습니다. 이 경향이 그리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많은 해석들은 아직도 이러한 청년기 마르크스의 주장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처해 있는 삶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맨체스터의 직물공장에서 일한 엥겔스의 경험과 그가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1845>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마르크스의 사상이 시작되는 것은 1848년에 쓴 <공산당 선언>에서입니다.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이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사회 구성원이 적대적인 계급들로 분열된 계급사회에서 사회적 변동의 원인이 되는 현상, 주로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가리킨다.)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모든 종교와 기존 정치 질서가 말하는 ‘신성한 것’을 없애 버린 자본주의의 공헌을 지적합니다. 그런 연후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합니다. 그에 따르면, 계급의 존재는 생산의 발전 단계와 연관되어 있고, 계급 사이의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은 계급투쟁을 야기하여 궁극적으로는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며, 결국에는 모든 계급이 폐지되어 계급 없는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에 따라 역사를 5단계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원시 공산주의, 둘째는 노예제, 셋째는 봉건제, 넷째는 자본주의, 그리고 마지막이자 필연적 단계인 공산주의로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보면, 자본주의의 폐해인 빈익빈 부익부, 무전유죄 유전무죄, 졸부들을 공허한 날갯짓 등으로 인하여 그 슬픔에 깔려있는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인 사회일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다만 지구상의 반쯤에서 실험된 결과 공산주의 세계에서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과연 계급 없는 사회는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일까요? 플라톤의 이상처럼 철학자들이 정치일선에 나선 적은 유사 이래 거의 전무하다고 할 것입니다. 역시 마르크스는 정치권력을 거머쥔 위정자가 아닌 사상가에 머물렀었고, 그의 이상은 후의 권력욕에 집착한 일련의 추종자들의 오만에 의해 무참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 자본주의의 ‘인간 소외’ 작용

~ 모든 부는 노동에서 나온다. 따라서 사유재산은 한 계급의 노동 산물을 다른 계급이 몰수함으로써 생긴다. 자본주의에서는 부가 부를 낳는다. 개인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처럼 변한다. 노동 역시 하나의 사물이자, 하나의 재화(노동력)로 여긴다. 노동자는 겉보기에슨 자유로운 교환의 형식을 통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고, 자본가들은 이익을 내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사실 자본가들은 노동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그 가치에 상응하는 대가, 즉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받고 팔아넘긴다. 그러나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하는 것은 이런 가치 이상이다. 노동자는 상품 외에도 잉여가치를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 이윤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은 추상적인 노동력에서 잉여가치를 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마르크스의 소외개념

~ 마르크스는 소외를 두 가지 면에서 취급한다. 하나는 인간이 인간의 생산물에서 소외되는 관계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자기 소외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되는 관계는, 생산물이 인간노동으로부터 대상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모든 시대를 통해 불변하며 노동자가 보다 많이 생산할수록 그만큼 더 빈곤해지게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사회에서 노동자의 생산물은 노동자에 대하여 소원한 것이 되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독립된 것, 더 나아가서는 그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된다. 쉽게 말해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자신이 만든 생산물에서 소외를 느낀다.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인간이 그 생산물에서 소외되면 생산 활동도 자기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서먹서먹한 것이 됨으로써 단순한 생활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이것은 고통스러운 강제된 노동이 되므로 생산자는 결코 여기서는 자기의 충족을 누릴 수가 없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을 단순한 생활 수단으로 하는 상태에서는 노동자 상호간의 관계도 서먹서먹해지기 마련이다. 요약하면 소외란 인간이 자기가 생산해 낸 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이 자기의 생활상의 업무에 만족할 수가 없으며 또한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이해타산의 관계로 변질되어 스스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자본>과 새로운 철학의 실천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에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다듬어집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를 목격하고 그 사회의 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연구되었던 경제학을 발판 삼아 이루어지는 방대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긴 연구 끝에 1859년 <자본>의 예비 작업에 해당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출간합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역사 발전의 기본 법칙을 묘사합니다. 역사는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을 통하여 발전합니다. 생산력은 한 사회가 가지는 생산의 힘을 말하는 것이고, 생산 관계란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 생산 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란 기계와 같은 생산 수단을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시스템이고, 봉건주의적 생산 관계란 토지를 영주가 소유하고 있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는 일반적으로 잘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 사회의 구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생산력은 새로운 기술과 도구의 개발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반면, 생산 관계란 구조적으로 굳어져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변화가 무척 더딥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어느 시점에 이르면 발전된 생산력이 굳어진 생산 관계와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생산력의 발전은 지체되어 한 사회의 경제 시스템이 잘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사회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혁명은 경제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예술의 ‘상부구조(경제적 토대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경제 체제와 조응하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종교 등의 형태. 혁명은 상부구조에서 시작하여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킨다.)’에서 일어납니다. 상부 구조는 한 마디로 경제적 시스템에 맞물려 있는 여러 가지 사회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경제적 토대와 대응하는 상부구조입니다. 그것은 특히 정치권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그 힘을 통해 경제적 토대와 다른 여러 제도를 혁신해 낼 때 바로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고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최소 단위인 상품의 분석에서 출발하여, 그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런 후 임금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를 설명합니다. 예컨대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그 노동에서 나오는 가치를 노동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노동자가 12시간을 일했을 때 자본가는 6시간어치만 임금을 지급하여 나머지 6시간 분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가가 착취하는 가치를 ‘잉여가치(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의 기본 개념. 투하된 자본에 의해 얻어진 초과분을 가리킨다. 생산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적 적대의 표현으로 노동자의 착취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잉여가치를 통하여 자본가는 지속적인 자본의 확대 재생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마르크스의 주장입니다. 요즘은 이런 이론이 지지를 얻기 힘들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착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본 학생들은 일한 만큼 받는 돈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일한 만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만 그 대가를 항상 제대로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요즘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지나친 임금인상 요구나 잦은 파업 등이 오히려 사회문제가 되고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과거에 비해 노동자층의 입장과 권익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실제로 정치적인 힘으로 떠올랐습니다. 1869년 창당된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사민당의 전신)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생겨났고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들의 정치 강령으로 자리 잡았으며 마침내 러시아에서는 레닌(1870~1924)의 주도 아래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인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는 거대한 정치적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실험들은 마르크스의 전환된 철학, 즉 있어야 할 세계를 만드는 철학에서 나온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세계의 변혁


  마르크스는 혁명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사상은 한때나마 세계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에서 정치적인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많은 무산 계급의 희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철학을 세계의 변혁을 위한 무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이전의 모든 철학은 그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철학에서 시작한 그는 철학의 변혁을 원했고, 그것은 역사에 녹아들어, 있어야 할 세계를 만드는 철학이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의 단결을 요구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가 읽을 것은 사슬밖에 없다고 선언합니다. <자본>은 그런 점에서 이전의 철학적 저작들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적을 알기 위한 싸움이었고,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구조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세계의 변혁을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본을 집필하는 동안 그는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그의 두 딸은 이 가난의 희생양으로 죽어 갔고 친구 엥겔스가 준 후원금이 떨어지면 그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의 가재도구와 자신의 옷을 하나둘 전당포로 날라야 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시간은 지나갔고 <자본>의 제1권은 1867년 출간되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마르크스는 세계의 변혁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희망했던 변혁은 오늘날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죽고 33년이 지난 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성립한 ‘사회주의 사회’는 마르크스를 철저히 배신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타락했고 채 백 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공헌이 완전히 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와 복지제도는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는 여전히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세계의 변혁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박해용), 서양 철학사(서용순), 서양 철학사(램프레히트), 친절한 철학 쉽게 읽는 철학사(리처드 오스본), 서양 철학사(버트란트 러셀), 알기 쉬운 철학의 세계(조정옥), 철학의 문제들(버트란트 러셀), 철학 삶을 만나다(강신주), 서양철학사 100장면(김형석) 등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 지혜롭게
글쓴이 : 지혜롭게 원글보기
메모 : 독불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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