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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 사상과 ‘한국의’ 철학

한신학 han theology 2012. 12. 16. 11:47

외래 사상과 ‘한국의’ 철학

 

한국이 적어도 2,000년 이상의 문화사를 가지고 있고, 삶의 양식 형성에는 불가불 철학 사상이 관여되기 마련이라면, 한국에는 이미 전통 철학 사상이 있었을 터이고 실제로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무슨 연유로 한국 사회에 낯선 사상이 유입되고 그것이 단지 호기심을 따라 소개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 더 나아가 생활 방식 자체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한국인들은 왜 20세기 초 이래로 서양 철학을 배우며, 그것도 열심히 익히고 있는가?

'철학'이라는 것도 하나의 학문이고, 학문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를 일컫는 것이라 했는데, 도대체 '서양의' 철학, '동양의' 철학, '한국의' 철학, 또는 '조선시대의' 철학, '이율곡의' 철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남의 철학을 배워 내 철학을 삼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며, 그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일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연과학'이니 '사회과학'이니 하는 제 과학의 종가(宗家)이자 근본학으로서의 오늘날의 '철학'을 규정해 보자면, '자연과 인간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문자적으로는, '한국의 철학'이란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자연과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합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이 무난하다면, '한국'이 들어갈 자리에, '서양'이나 '동양', '독일'이나 '중국'을 넣거나, 더 나아가서 '기호 지방', '영남 지방' 또는 '이율곡', '이퇴계'를 넣어 '~의 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도, 예컨대 '한국 사람',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 '자연과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또 이 세 조건 중 일부만 충족시키는 경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좁게 때로는 넓게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며, 심한 경우 그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사용하면 '서양 철학', '한국 철학' 따위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또 남의 철학 문헌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까지를 '철학하다'의 범위에 집어넣는다면, '○○철학'의 규정에서 누가 어떤 언어로 작업을 하는가는 부수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의 국적을 말해 주는 본질적인 징표는 무엇인가? 우리가 한국 철학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철학인가? "어떤 철학의 국적을 결정짓는 것은 그 철학을 배태시킨 철학자의 탄생지도 아니고, 그 철학자가 주로 활동한 지적 단위체나 그가 사용한 언어도 아니다. 만일 첫째의 기준이 적용된다면 스피노자 철학은 네덜란드 철학이 될 것이고, 둘째 기준이 적용된다면 김재권의 철학은 미국 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영국 철학이 될 것이고, 셋째 기준이 적용되면 퇴·율[退溪·栗谷] 철학은 중국 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독일 철학이 될 것이다. 이후 영향력의 기준에서 판별이 된다면 프레게의 철학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영국 또는 미국 철학이 될 것"이라고 어떤 이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철학은 국가적 성격을 갖기보다는 개인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논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 사상과 중국 사상, 독일 철학과 영미 철학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지각 없는 짓인가?

문화권의 경계라는 것이 먼 빛으로 보기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갈수록 희미한 탓에 지도에 국경을 표시하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는 게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성의 문화를 충분히 의미 있게 공간적으로·시간적으로 구분하여 얘기할 수도 있고, 구별되는 대개의 특징을 열거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또한 문화의 한 양상인 철학에 대해서도 물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 살았고 살든 인간인 한에서 상호 간에 보편성을 나눠 갖게 마련이지만, 또한 개인간에 집단간에, 뿐만 아니라 일정 개인이나 집단이라 하더라도 연대별로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철학도 그것이 철학인 한 '원리적 지식 체계'라는 보편성이야 가지고 있겠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했고 그렇게 하는가에 따라 구별될 수도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별하고 청년 칸트의 철학과 장년 칸트의 철학을 구분하며,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사상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철학을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똑 같은 정도로 의미 있게 한국 철학과 독일 철학을, 그리고 조선 중기의 한국 철학과 현대의 한국 철학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축이며,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근대 독일 철학의 핵이고,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의 성리학은 근세 조선의 철학을 대표하며, 열암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의 철학은 1950~60년대 한국 철학의 일면을 분명하게 대변한다. 김재권(Jaegwon Kim)이 한국인의 한 혈족이라 하더라도 그가 미국 사회 문화 속에서 생긴 철학적인 문제를 미국에서 통용되는 말로 쓰고 생각하고, 그 결과가 미국에서 논쟁 거리가 된다면, 그의 철학적 작업은 '미국적'이라고 평가함이 합당할 것이다. 독일 철학계를 들판으로 비유할 때, 한국인 백 아무개가 독일에서 독일말로 칸트 철학에서 제기된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했다면, 그의 작업은 독일 철학계라는 들판에 돋아난 들풀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뜻에서 '독일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서 한국적인 '임-있음'의 문제 시각에서 '존재자의 본질-존재' 해명을 시도했다면, 그의 작업은 '한국적'이다. 더구나 그가 한국에서도 이 작업을 한국의 문화 의식 속에서 한국어로 계속하여 결실을 본다면, 그것은 한국 철학의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도로 '한국 철학'의 개념을 우선 정리하고,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 한국인들에게 철학이란 무엇이고, 왜 한국인들은 20세기 초 이래 서양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사상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대체 이런 판국에 사람들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 철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른바 철학자들은 철학이 제반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그리고 선도할 수 있다고 자부하나, 사실은 여타 문화 영역을 뒤따라 가는 경우가 더 많다. 20세기 초에 서양 철학이 한국 사회에 유입된 것도, 당대 한국인들의 철학적 자각과 모색으로부터 그 길에 이르게 되었다기보다는 서양의 제반 문물이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라 한국 사회에 밀어닥침으로 인해 서양 문화의 한 가닥으로 함께 들어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철학의 학문적 성격과 역할이 제 과학의 맨 뒤에 오면서도 제 과학의 단초와 원리를 추궁하는 것인 만큼, 한국의 제반 학문 세계가, 다시 말하면 표층 문화를 주도하는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생물학, 법학, 정치학의 세계가 이미 서양적 흐름에 합류했는[휩쓸려 들어갔는]데, 철학이 여전히 성리학적인·실학적인 전통만을 이어간다면, 그렇지 않아도 현대에 와서 신통치 않아진 이른바 분과학(分科學)의 근본학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은 허공에 뜬다. 현대 한국 사회의 질서와 정의의 골간을 이루는 헌법 체계가 어느덧 유교 원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정신을 떠나 미국 헌법, 프랑스 인권선언, 독일 헌법 정신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재래의 법 철학, 정치철학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어떤 법 원리, 정치 원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서 당초에 서양 철학의 접수가 자발적이 아니었음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현실 생활과는 전혀 무관하고 철학자가 사회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있다면 몰라도, 이미 사회 근간이 서양식으로 재편되어 가는 마당에 철학한다는 사람이, 그가 순전히 과거 한국 철학의 역사 연구가 이길 지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재편되어 가는 문화 양상의 근거를 탐구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현대 한국 사회 운영의 토대인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한국의 철학자들인 퇴계나 율곡 혹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사상보다는 로크나 루소(J. J. Rou-sseau, 1712~1778) 또는 칸트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 필요로 한다.

물론 문화 양상은 중층적인 만큼 표피층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도 심층에는 여전히 옛 물이 두텁게 남아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만큼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서양적 철학을 한다고 해도, 한국식 서양 철학, 바꿔 말해 화제는 서양에서 발원했으나 그러나 이미 한국인들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한국의 철학, 곧 한국(적) 철학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서양 철학을 수용했고 그리고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로 인해서 한국인들의 철학적 문제가 순전히 '서양적'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얘기는 예컨대 한국인들이 중국으로부터 삼국시대에 불교 사상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성리학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주류(主流) 사상은 언제나 외래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상사는 외래 사상 수용사인데, '한국 사상', '한국 철학'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과연 외래 사상을 접수했다고 해서 일체의 고유성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일까?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연원을 따지면 그리스 사상이고 기독교 사상이라 해서 우리는 독일 철학을 얘기할 수 없는가? 문제의 발원이 남에게 있다 하더라도, 문제 의식이 수반되어 그 문제가 이미 자기 문제가 된다면, 그 문제 해결 방식과 결과도 상당 부분 자기 것이 된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서양 철학은 무엇인가? 기자(記者)적 관심에서 단지 소개되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 사실 한국에서 이른바 '서양 철학하는 사람' 가운데 오히려 서양 철학의 역사나 현황을 보고하는 '기자'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 일정 부분 한국적 문제 의식과 문제 해결의 관심에서 수용되고 변용된다면, '서양' 철학은 그만큼 '한국의'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오랜 동안 중국 철학 사상을 수용하다가 난데없이 서양 철학을 떠들게 된 것은 '한국의' 제 문화 양상이 어느 사이 서양화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한다. 20세기 초 이래 당초에 한국인들이 그것을 평가하고 선택할 겨를도 없이 서양 철학이 유입되고,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현대의 한국 철학 형성에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단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체성 결여에서라기보다는 한국의 문화, 적어도 표층 문화 전반이 서양화하는 탓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주체성도 없이 어제는 '중국적' 철학에 오늘은 '서양적' 철학에 ― 그것도 독일 철학, 프랑스 철학, 영미 철학 등 이른바 강대국 문화권의 철학을 번갈아 가며 ― 쓸려 들어간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한국에서 주체적으로 철학하는 사람은 '서양' 철학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한국인들이 아프리카(탄자니아나 니제르)의 철학 혹은 아라비아의 철학은 거의 수용하지 않고, 중국 철학이나 서양 철학을 수용한 것은 그것이 ― 수동적으로 세계 정세에 휩쓸려 들어간 일이든, 능동적인 문화 향상 전략의 일환이든 ― 한국 사회의 제반 문화·학문 영역에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서 한국인들의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원리를 어느 면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인들에게 수용된 '중국' 철학이 한국의 철학이 되었듯이, 그와 같은 정도에서 그리고 같은 의미 연관에서 현대의 한국인들이 수용하는 '서양' 철학은 현대 한국 철학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이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유감스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 사상의 유입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탐구 대상으로 부각된 철학적 문제들이 다분히, 종래 탐구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갑작스레 정치적 외세(外勢)에 실려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한국인들에게 부과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철학사 주류의 관점에서는 19세기 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서구 철학 사상이 유입됨으로써 한국 사람들도 세계사의 대류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철학 사상을 통사(通史)적으로 볼 때, 한국 철학 사상사는 19/20세기 간에 단절과 전환이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한국 철학 사상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였다고 언젠가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일단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힘과 자생력을 잃고 '세계 주류'라는 이름 아래 밀려 들어오는 서양 강대국에서 힘을 얻은 사상을 수입하여 주석·해설하는 따위의, 사상의 주변을 맴도는 일에 한 세기 내내 종사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비록 외형적으로 정치적 식민 상태는 벗어났음에도 철학 사상적으로는, 포괄적으로 말해 정신 문화적으로는, 더 오랜 동안 식민 상태를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살든 '인류'라고 묶여질 수 있는 그만큼은 보편성을 가질 터이므로, 철학적 문제와 해결 방안도 그 범위만큼은 보편적일 것이니, 바로 그 영역 내에서는 굳이 외래 사상이니 자생적 사상이니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화의 제 양상과 그에 수반하는 철학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국가 단위의, 또한 시대적인, 특수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한국인들의 사상이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사상이랄 것도 없는 것이며, 그럴 경우 그것이 한국의 문화나 세계의 문화 향상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역의 사상이 다른 지역의 사상과 단지 '다르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것이 특별히 좋다고 내세워져야 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요즈음 세계 일류 국가에서는 이런 철학 사상이 풍미하며, 이런 철학적인 문제가 각광을 받는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도 그런 것을 탐구할 필요가 있고, 해야만 한다"는 문맥에서 외래 사상을 추종하고 수용함으로써 보편성을 유지하는 그런 사고 활동을 '한국의' 사상이라고 내세우기는 더욱이 어렵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국의' 철학을 얘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노고의 결실이 세계 문화 수준을 이끌만한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한국적인 문제 ― 예컨대, 서양 존재론의 번역·해설이 아니라, '이다'-'있다'의 구조 분석이라든지, 한국에서 계사(copula) 구조의 탈락 현상 해명이라든지, 동서 문화의 접점에서 생긴 '이성' 내지 '합리성' 개념의 새로운 정립이라든지,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 지점에서 사회 운영 원리나 세계 평화의 원리 모색이라든지, 유교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혼융의 어려움 극복과 같은 ― 상황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와 아울러 민족 역사적·문화 전통적 특성을 갖기도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철학은 '중국적'일 수도 있고 '독일적'일 수도 있으며, '미국적'일 수도 있고 '한국적'일 수도 있다. 이때 '~적' 철학은 물론 특정 시대, 특정 지역,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유효할 수도 있지만 ― 이 점에 있어서는 이른바 '과학'들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에 '~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른 철학과 구별하는 것은 그 유효성의 제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그 주제 전개 양태의 특별성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실용주의 철학을 '미국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론이 미국 사람에게만 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이 특히 미국에서 정치하게 전개되었고, 미국적 생활 양상을 잘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며, 또 정언적 명령에 의한 의무에 따르는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라고 평가하는 철학 체계를 '칸트적', 또는 '프러시아적', 또는 '독일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도덕 철학이 칸트 자신에게만, 또는 18세기 후반 독일 사람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독일 사람들의 의무 관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 철학'을 얘기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의 '한국적' 철학이다. 독일적인 문제나 미국적인 문제 가운데 단지 특정 지역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처럼, 한국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그것이 타지역 사람들에게 현안 문제로 의식되지 않았을 뿐 근본적으로는 인류 공동의 문제인 것이 많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한국의 철학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 문화에 다양성을 주어 인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철학의 성립은 그 주석의 소재가 800년 전의 고려 불교 사상이냐, 400년 전의 조선 유교 사상이냐, 200년 전의 독일 철학이냐, 현대의 미국 철학이냐에 따라서 좌우된다기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탐구 자세 그리고 연구 방법과 연구 결실이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나 한국적 특수성을 담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율곡·다산의 전적을 주해·요약·해설하는 일은 '한국 철학을 하는 것'이고, 로크·칸트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서양 철학을 하는 일'이라는 식의 이해는 올바른 것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도 기껏 전자는 한국 철학사 고전 연구의 일환이고, 후자는 서양 철학사 문헌 연구의 한 가지라고 말하는 정도가 제격일 것이다.